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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계사로 이어지는 가락국기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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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계사로 이어지는 가락국기 Ⅱ
  • 조유식취재본부장
  • 승인 2011.08.04 13: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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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시리즈 가락국의 탄생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선사(一然禪師)의 민족애(民族愛)가 겨우 그 매몰의 압력 속에서 구출해낸 `가락국기`를 역대 한족계열(漢族系列)이거나, 그 세력에 영합해야 한 사관(史官)들이 탄괴지서(誕怪之書)라 규정하고, 정사(正史)의 근처에도 못오게 만든 이유의 하나가 이로써 명백해진다.

 
   

그것은 고대 동서(東西)문화 교류의 대동맥이던 실크로드 가운데도 활발한 교류 실적을 가진 해상(海上)의 루트를 없는 것으로 해야만, 동북 아시아의 모든 문화는 한족들의 은덕(恩德)이라는 사실이 역사적으로 고정(固定)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해상의 루트의 최종착지인 가락국으로 부터, 그 당시로서는 문명의 최첨단 소재이던 철(鐵)을 공급받던 한(漢)의 후예나 왜(倭)의 후손들이 이 역사의 사실을 지워버리기 위해서는 `가락국`을 없었던 나라로 돌리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불가결 했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제 우리는 `가락국기`를 아무런 선입감 없이 조상께서 손수 물려주신 유산으로 받들어 그 기록을 충실히 음미해서 이처럼 세계사(世界史)와 직결하는 가설을 성립하게 되었다.

이제 이 가설을 하나하나 현장검증을 통해서 증명할 의무가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었다.

이것은 또한 나의 제3의 과제(課題)가 아닐 수 없고, 그 제3의 과제는 `진주태후허씨`의 `진주`의 현주소를 찾아내어 그곳으로 가서, 잃어버린 한국사와 세계사의 고된(Link)를 찾는 일이라 할 수 있다.

   
 
  ▲ 물시계.  
 

최초의 물시계 `시동호(侍銅壺)`양과청소(兩過淸宵)하시고, 일경백주(一經白晝)하신 욱궁이고 보면 다음날의 유궁 출발은 이른 아침일수 밖에 없다.

8월 1일, 희락(廻樂)할새, 여후동렴(與后同輦)하시고, 임신부처는 재록병가(齋錄병駕)하더라. 그 한사잡물(漢肆雜物)도 감사승재(感使乘載)하여, 서서(徐徐)히 입궐(入闕)할제, 시동호(時銅壺)는 욕오(欲午)하더라.

다시 어려운 자가 나열되는 이 귀절을 옮기면 8월 1일에 행차를 돌리실제, 수로왕은 왕후와 같은 연(輦)을 타시고, 임신은 말을 타고 그 부인은 가마를 탔으며, 갖가지 박래(舶來)한 혼수(婚需)들은 수레에 실어 서서히 입궐 하였을 때 시동호(時銅壺)는 정오(正午)를 알리고 있었다. 이렇게 읽을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시동호욕오`이다. 우선 `욕오(欲午)라는 말은 `정오가 되려하다`이지만, `시동호`란 무엇이겠는가?

 
   

우리 손으로 국역(國譯)된 대표적인 `삼국유사`는 이 귀절을 `서서히 대궐로 들어오니 때는 오정이 되려 하였다` 이렇게 이 귀절을 옮기고 있다.

이 `시동호`에서 `동호`는 빼버리고, `시(時)`만 옮긴 것이다. 그러나 이때까지 우리는 `삼국유사`가 초록한 `가락국기`의 어느 한 글자도 빼거나, 조작하지 않고 여기까지 읽었다.

그러므로 `시동호`라는 생소한 명사(名詞)도 `아유타국`과 마찬가지로 가공의 것으로 돌릴 수 없다. 그러나 `시동호`라는 이름을 밝힐 문헌(文獻)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글자 그대로를 해석하면 `때를 알리는 구리 항아리`이다.

그런데 구리 항아리 위에 `시`가 붙은 것, `시`와 `동호`의 합성어(合成語)인 이 `시동호`는 시각을 알리는 구리 항아리일 수 밖에 없고, 그것은 물(水)시계일 수 밖에 없다.

후대에 와서 `누각(漏刻)`이 바로 이 `시동호`일 것이다. `니혼쇼끼(日本書記)`를 보면, 서기 671년 백제의 기술지도로 제작한 물시계는 세개의 누호(漏壺)로 이뤄진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서기 718년에 신라에서 누각전(漏刻典)이라는 물시계 담당부서가 생겼고, 박사 6인, 사(史) 1인을 두었다는 것을 보면, 이 지역의 물시계는 오랜 옛부터 전수되어 개발해 온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일본을 포함한 고대왕국에서 물시계로 시작을 측정했다는 최고(最古)의 기록도 가락국이 보유하고 있음을 `가락국기`는 증언하고 있다.

 
   

그 `철(鐵)`과 이 `시동호`는 가락국의 해운력(海運力)이 실어온 비한족 경유(非漢族 經由)의 문명의 이기임에 틀림이 없다.

이 문화수준에다가 다시 새로운 문화세력(文化勢力)의 도래(倒來)의 사실이 문화사(文化史)의 측면에서 본 허황후의 가락국 당도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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