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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역사 기획시리즈 가락국의 탄생(15)-왕후가 지참하신 것 장군차(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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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역사 기획시리즈 가락국의 탄생(15)-왕후가 지참하신 것 장군차(茶)
  • 조유식취재본부장
  • 승인 2011.08.11 12: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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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시리즈 가락국의 탄생

왕후가 거처하는 궁을 "중궁(中宮)"이라고 부른것도 한반도의 역사의 기록으로는
<가락국기>가 처음이다.
왕후의 별칭(別稱)이 "중궁마마"였던 조선조의 관습은 멀리 그 연유가 가락국으로 소급함을 알 수 있다.

 
   

왕후(王后)는 이에(愛) 중궁(中宮)에 처(處)하게 하고 잉신부처와 그 사속(私屬)은 공한(空閑)한 이실(室)을 칙자(勅賜)하여 분입(分入)케 하고, 여외종자(餘外從者)는 일좌(坐) 이십여간(二十餘間)의 빈관(賓館)에 인수(人數)를 작정(酌定)하여 구별(區別)하여 안치(安置)케하고 풍선(豊羨)히 일급(日給)하게 하고, 그 소재(所載)해온 진물(珍物)은 내고(內庫)에 장(臧)하여 왕후(王后)의 사시지비(四時之費)로 삼게 하였더라.

이렇게 <가락국기>는 입궐한 왕후와 그 일행을 중궁(中宮)으로 맞들이고, 일행의 거처 배정과 혼수물의 관리 등에 까지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연화사 내에 있는 부서진 불상.  
 

그리고 보면, 수로왕은 현재 김해 패총에 인접한 봉황대(鳳凰臺)와 그 아래 회현리에 유허가 있는 가락본궁(駕洛本宮) 이외에도, 혼례를 위한 유궁(惟宮)과 원래(遠來)할 왕후 일행이 거쳐할 중궁까지를 서기 46년 음력 7월 이전에 마련했음이 분명하다.

 

이 중궁의 옛터는 지금 연화사(蓮華寺)가 있는 일대인데, 그 동쪽의 옛지명이 "다전(茶田)"이고, 비록 폐옥이 되었지만 "다산재(茶山齋)"라는 건물이 남은 것을 보면, 다(茶)의 고장 복건성(福建省)의 다목(茶木)도 왕후와 함께 이 땅에 뿌리내렸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어쨌거나 중국자리인 연화사 경내(境內)에 조선조 말엽에 세운 "가락고도궁허비(駕洛古都宮墟碑)"라는 비가 있다. 이 비 때문에 이곳을 가락왕궁으로 단정한 사람들이 이 궁허(中宮墟)의 서남쪽에 수로왕릉이 위치함으로, 현 수로왕릉과 궁지(宮址)가 뒤바뀌어 전했다는 설을 펴는 소동까지 있었다.

또한, 왕후가 거처하는 궁을 "중궁(中宮)"이라고 부른것도 한반도의 역사의 기록으로는 <가락국기>가 처음이다.

왕후의 별칭(別稱)이 "중궁마마"였던 조선조의 관습은 멀리 그 연유가 가락국으로 소급함을 알 수 있다.

구체적인 품목(品目)대신, 어려운 한자를 나열해서 왕후가 지침한 혼수의 종류를 적은 <가락국기>는 진귀한 것들(珍物)이라 적어, 그것을 본궁의 창고가 아닌 중궁의 창고 "내고(內庫)"에 간수하여, 왕후가 쓰도록 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일용(日用)의 진물 가운데는, 가락국의 일상생활을 보다 편리하게 할 물건들이 있었을 것이지마는, 앞에서 언급한 차(茶)와 마찬가지로, 일상생활에 관련되는 새로운 문화가 그 내고에서 가락국으로 그리고 인접지역으로 파급되어 갔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문화외에 정치문화(政治文化)에 관한 것들이 왕후와 함께 가락국에 도착한 것도 분명하다.

一日(일), 상(上)께서 신하(臣下)에게 어(語)하여 이르시되 간등(九千等)이 구위(俱僞)해서 서료지장(庶僚之長)이 어늘, 그 위(位)나 명(名)이 개시(皆是)하여 소인야부지호(宵人野夫之號)일뿐, 잠리(簪履)의 직위지칭(職位之稱)에 돈비(賴非)하나니라.

당화(黨化)하여 외(外)가 전문(傳聞)할진데, 치소지치(嗤笑之恥)가 필유(必有)할지니라.

이렇게<가락국기>는 이어진다. 그 "一日"이라는 것이 왕후가 도착한 후의 "하룻날"이다.

九간들이 백성의 장(長)인데, 그 간의 직위며, 이름없는 촌뜨기와 같아서, 이 일이 밖(외국)에 전해진다면 필연코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수로왕이 말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추개(遂改)하여 아도(我刀)를 아궁(我窮)으로, 여도(汝刀)는 여해(汝諧)로, 피도(彼刀)는 피장(彼臧)으로, 방(五方)은 오상(五常)으로 하고, 유수ㆍ유천(留水ㆍ留天)은 상자(上字)를 부동(不動)하고, 하자(下字)를 개(改)하여 유공(留功)ㆍ유덕(留德)으로 하고, 신천(神天)은 신도(神道)로, 오천(五天)은 오능(五能)이라 개위(改爲)하고, 신귀(神鬼)의 음(音)은 불역(不易)하여 신귀(臣貴)로 하였느니라.

이렇게, 구간들의 개명(改名)을 나열하고는,

계림(鷄林)의 직의(職儀)를 취(取)하여 각간(角干)과 아질간(阿叱干)과 급간(給干)의 질(秩)을 치(置)하고, 기하(其下) 관료(官僚)는 주판(周判), 한의(漢儀)로써 이를 분정(分定)하였으니, 이는 고정(古鼎)을 혁(革)하여 관분직(官分職)을 신설하는 도(道)일진저.

이렇게 가까운 신라와 멀리 주(周)와 한(漢)의 벼슬아치의 직분을 본받아 바꾼 것이라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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