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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를 지킨 사충신의 묘단 '사충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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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를 지킨 사충신의 묘단 '사충단'
  • 조유식취재본부장
  • 승인 2013.08.20 12: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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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동 유적지로 이전해야 한다

2011년 07월 12일 (화)

아이들에게 충효의 교육장이 되도록 해야
어른도 찾기 힘든 신어산 중턱 모두 외면
 

 
   

사충단은 임진왜란(1592) 당시 김해성을 지키다 장렬히 전사한 네 의병장 김득기(金得器), 송빈(宋賓), 이대형(李大亨), 유식(柳湜)을 기리기 위해 1871년(고종 8) 고종의 명으로 건립된 묘단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1600년(선조 33)에 이들은 모두 가선대부(嘉善大夫) 중에서 김득기와 이대형은 이조참판, 유식과 송빈은 호조참판으로 각각 추증(追贈)되었다.

1990년 12월 20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99호로 지정된 송담서원 안에는 비각(碑閣)을 제외하고는 모두 1995년 당시 신축된 건물로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에 겹쳐 맞배지붕을 올린 주심포집으로 비각 안에는 사충신이 추증받은 직함이 새겨진 비석이 있다.

조선 선조 25년(1592) 동래성을 함락한 왜적이 병력을 이끌고 김해성을 공격해 오자 당시 김해성의 주장군이었던 서례원이 김해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 때문에 김해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김득기ㆍ송빈ㆍ유식ㆍ이대형 의병장이 각기 의병들을 거느리고 성으로 들어가 적들과 죽을 힘을 다해 싸우다 작렬하게 순절하였다.

이것이 임진왜란 의병의 시작이 되었다.고 전해 온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3년 만인 선조 33년(1600) 왕은 이들의 충절을 기리고자 각자의 벼슬을 올려 주었으며 숙종 34년(1708) 지방 사람들의 도움으로 `송담사`와 `송담서원` 을 세워 이들의 위패를 모셔 두었다가 순조 33년(1833)에 `표충사`라 이름 지었다.

이후 고종 8년(1871)에 단을 설치하여 `사충단`이라 이름 짓고 비를 세워두었으며 매년 음력 4월 20일을 제사 일로 정하여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사충단은 처음에 김해시 동상동 881-11번지(김수로왕의 왕비 궁터였던 연화사 포교당 앞)에 있었던 것을 동상동 227-6, 8번지로 강제 이전됐다가 구획정리에 의한 택지개발로 현재 위치인 동상동 161번지 분성산 중턱으로 이전되었고 특정일을 제외하고는 24시간 문이 꽁꽁 잠겨 있다.

사충단이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산으로 산으로 자꾸 밀려 올라가게 된 것은 왜적 때문이 아니라 특정인의 물욕 때문이었다는 것이 사충단을 아는 시민들의 주장이다.

사충단이 무엇 때문에, 어떤 연유로 도심 한복판에서 어느 날 갑자기 아무도 찾지 않는 쓸쓸한 산 중턱으로 밀려 올라 가야만 했는지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시 관계자 조차도 "옮긴 사유는 모르겠고 다만 처음 이전은 동상동 재래시장의 확장 문제로 옮겨간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하였지만 사실을 잘못 알고 있다.

기자가 취재하면서 발견한 것은 특정인을 도와주기 위한 분명한 특혜성 강제 이전이었다.

사충단이 시내 중심지에서 사라진 사유를 살펴보면 1993년 9월 16일 사단법인 김해시장번영회가 이 토지를 김해군으로부터 불하받아 소유권보존등기를 마쳤다. 하지만 토지등기를 마친 동상동시장번영회는 6일 후인 1993년 9월 22일 당시 지역 유지였던 K모 씨의 부인 앞으로 소유권을 넘겼다.

동상동시장번영회는 재래시장 확장에 꼭 필요하다며 민원을 제기하여 어렵게 국유지를 불하받았는데 무엇 때문에 6일 만에 개인 앞으로 소유권을 이전 해 주었을까?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동상동시장번영회를 좌우지 할 수 있을 정도의 힘있는 그 유지가 자신의 상가와 대지 주변에 있는 유역사적인 사충단 때문에 상가 증축과 확장에 방해가 되고 있는 사충단 토지를 불하 받으려고 했지만, 개인이 국유지를 불하받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사단법인 김해시장번영회를 내세워 일단 불하를 받게 한 뒤 자신의 부인 앞으로 소유권을 넘겨받는 편법을 썼던 것이다.

이렇게 문화재인 사충단의 토지를 불법과 편법으로 사들인 그 대단한 김해유지는 사충단 토지의 소유권 이전 등기를 마친 얼마 후 사충단을 동상동 토지구획정리 지역으로 이전시키고 그 자리에 대형 개인상가건물을 신축했다.

김해시 동상동 연화사 포교당 절 화장실 앞에 있는 상가건물이 바로 사충단 자리였다.

이 상가가 신축되고 나서 한참 동안 김종간 전 김해시장이 웅변학원을 운영했고, 예식장으로 운영되기도 했다.

이처럼 역사 유적지인 사충단이 특정 인사에 휘둘리면서 재산증식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준 곳은 바로 행정관청이었다.

당시 김해군청은 사충단 토지의 지목과 지번을 변경하거나 분할, 통합하는 방법으로 지목을 일반대지로 변경, 특정인의 대형 상가건축이 가능하도록 도와주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문화재로 인하여 재산권행사를 제대로 못하던 김해유지가 시장번영회를 이용하여 사충신의 묘단(廟壇)을 통째로 옮겼고 유적지보호지역을 해지하여 엄청난 부를 창출하게 됐던 것이다.

이렇게 갈팡질팡, 오락가락, 모르쇠로 역사 유적지를 관리해온 행정 관료들 때문에 역사에서 자랑스러운 김해를 찾을 수 있고, 김해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이며 유적지인 사충신과 사충단이 후손들과 시민들 곁에서 강제로 잊혀져가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이라도 김해시는 사충신을 모신 사충단을 국립김해박물관 주변이나 봉황동 유적지 주변으로 이전하여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김해사람으로서의 자긍심과 충절의 정신을 본받을 수 있는 산교육장이 되도록 해야 한다.

김해시민 절대다수가 사충신과 사충단이 있는지 조차 모른다는 것은 현재의 기성세대인 우리에게도 그 책임이 있다.

김해시가 시민들과 함께 공동사업을 해서라도 김해지역의 문화재 보존 및 위대한 역사인물에 대하여 시민들에게 알리는 사업에 보다 더 적극적이어야 한다.

지역의 역사가 새로이 조명되고 훌륭한 인물을 본받을 수 있는 교육정책을 비롯하여 각종 문화행사를 위해서라도 관계기관 및 시민단체가 힘을 모아 사충신의 묘단을 누구나 쉽게 찾고 들려 참배할 수 있는 지역으로 이전해야 한다.

시민과 아이들이 사충신들의 품 안에서 백일장도 사생대회도 수시로 열 수 있는 우리와 가까운 곳으로 모셔오는 것은 후세들이 해야 할 일이다. 특정인에 의해 내몰린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것은 김해를 위해 미래를 위해서도 바람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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