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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읍성 유공정(柳公井) 보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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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읍성 유공정(柳公井) 보전해야 한다.
  • 조유식취재본부장
  • 승인 2013.12.26 17: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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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의병장 사충신 중 한 분 유식(柳湜) 선생 공덕비
유적지도 문화제도 기록물도 아닌 골목 안 돌기둥 신세
기록물 등록 추진하고 주변 정비하여 유적지 만들어야 한다

 

   
 
  ▲ 유공지정 유식 선생 공덕비문.  
 

김해시 동상동 연화사 포교당 앞을 지난 시장상가밀집지역을 따라 조금만 남쪽으로 가다보면 시장사거리가 나온다. 그 사거리 남서쪽을 끼고 있는 가게 옆 작은 골목을 들어서면 비 하나가 외로이 서 있다.

 

이 비가 바로 임진왜란 당시 의병이 되어 김해읍성을 지키다 목숨을 바친 사충신(四忠臣)중 한분인 유식(柳湜)선생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유공정(柳公井) 비 인 것이다.

높이 200cm의 자연 화강암을 이용하여 앞면에는 유공정 "柳公井"이라는 글자를 새 로로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유식(柳湜)선생의 공적을 새긴 유공지정( 柳公之井) 문이 새겨져 있다.

유공정 비 바로 앞 약 5m에는 우물이 있으며 지금도 사용하고 있지만 이 우물이 유공정인지는 알 수가 없다. 이 우물은 특이하게도 우물 안의 물이 우물 밖 바닥 높이 까지 차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냥 바가지로 물 을 떨 수 있을 정도이며 우물 옆으로 는 우수로가 있어 약 30cm 가까이 깊이 파져 물들이 흐르고 있었다. 우수로 보다 우물 안 샘물높이가 한참 높지만 샘물은 그대로 있었다.

기록에는 우물을 매웠다고 했지만 기자의 생각으로는 이우물이 분명 유공정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곳은 김해를 위해 백성을 위해 하늘이 내려준 우물이고 사충신의 한분인 유식선생의 백성을 살려야 한다는 마음으로 우물을 찾아다닌 혼이 담겨있는 곳이기도 하다.

가장 소중한 우리의 인물사와 유적인 이곳이 무지한 후대 사람들로 인해 좁은 골목 안 한 컷에 방치 되어있고 찾는 이도 없고 안내 표지 석 하나 없고 바로 옆에 시장사람들의 공중 화장실을 만들어 놓았다.

유적지를 정비하여 학생들의 역사 체험장으로 관광객들이 찾는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 하루빨리 기록물로 등록을 신청하여 문화유적자료로 보존해야 한다.

기자와 함께 이곳을 찾은 유경익 박사(서울대 졸업, 성균관대 석좌교수, 전 KBS 기자, 영문학 박사(영국 옥스퍼 대학), 문화재청 자문위원)는 유공정 비와 우물을 둘려본 뒤 비 뒷면의 유식선생의 공덕을 기리는 유공지정(柳公之井) 비문을 읽어보고는 이것은 김해의 역사이고 너무나 훌륭한 귀중한 자료라고 감탄사를 연발 했다.

 

   
 
  ▲ 유경익 박사가 유식 선생비문을 설명하고 있다.  
 

유 박사는 기자를 보고 하루 빨리 문화재 기록물이 될 수 있도록 하여 정부 지원금으로 주변 정비와 함께 보존 관리를 해야 한다며 수차당부하기도 했다. 만약 이대로 방치한다면 언젠가는 도시개발로 이 훌륭한 자료는 사라질 수 밖에 없다며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4개월 여 기간 동안 유 박사께서 직접 비 뒷면의 공덕비문의 원문을 성균관대와 각처의 기록 원들을 뒤져 원문을 찾아내어 해독하여 원문과 해설문을 보내 왔다.

기자가 이 공덕 비에 새겨진 내용을 알아보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 다녀 지만 유공정 비가 있는 지 조차 모르고 있는 기관도 있었으며 비문 내용을 알고 있거나 유공정 비에 대한 설명 자료는 단 한가지도 없었다.

지역 원로 서에가 벽암 허한주 선생님께서 대체적으로 상세한 말씀을 해주셨지만 비석 원문은 너무 마모되어 해석이 불가했다. 오늘 이처럼 유공정 비와 유식 선생 공덕비문 내용을 시민들에게 알릴 수 있어 너무나 가슴 벅차다.

귀중하고 소중한 역사자료이 이 비문 원문을 찾아내었고 검증까지 해주시며 해설문을 보내주신 유 박사님께 김해시민을 대신하여 이 지면을 빌어 고마움과 감사함을 전한다.

 

   
 
  ▲ 좁은 골목 안에 조금 보이는 것이 유공정이다.  
 

김해시가 앞장서서 유공정(柳公井) 비를 정부 기록물로 등재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고 주변도 잘 정비하여 동상전통시장을 찾는 사람들의 휴식과 아이들에게 좋은 교육현장이 될 수 있도록 해 주었으면 한다. 김해읍성은 김해에 자주 출몰하던 왜구의 노략질에 대비하여 축성한 성곽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김해읍성은 세종 16년(1434)에 축조된 석성으로 문종 원년(1451)에 둘레 4,418척, 높이 13척으로 기록 되고 있다. 김해사충신과 병사들이 왜적을 맞아 싸우는데 가뭄으로 인하여 성안의 모든 우물이 말라 먹는 물조차 구하지 못해 낭패를 격고 있었다.

이때 의병 유식(柳湜)선생이 성안을 돌아다니며 새 우물을 찾던 중 이곳을 발견하고 지팡이로 파니 물이 솟았다고 한다. 마르지 않고 넘쳐나는 이 우물물을 마시고 식수를 해결할 수 있어 성안 백성과 의병들이 왜적과 끝까지 항전했다고 전해진다. 오늘날 유공정은 유식(柳湜) 선생의 후손이 비를 세워 흔적을 보전 하고 있다.

김해 사충신은 타 도시에선 보기 드문 의병장들로서 임진왜란(1592) 때 김해성 싸움에서 전사한 의병장 김득기(金得器), 송빈(宋賓), 유식(柳湜), 이대형(李大亨)이다.

조선 선조 25년(1592) 동래성을 함락한 왜적이 병력을 이끌고 김해성을 공격해 오자 당시 김해성의 주장군 이었던 서례원이 김해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 유공정 앞에서 유경익 박사와 박석균 회장, 조유식 대표.  
 
   
 
  ▲ 우물안의 물이 맑고 가득했다.  
 
   
 
  ▲ 아직도 사용하고 있는 우물.  
 

 

이 때문에 김해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김득기ㆍ송빈ㆍ유식ㆍ이대형 등 4명의 의병장이 각기 의병들을 이끌고 몰래 성으로 들어가 적들과 죽을힘을 다하여 싸우다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 33년(1600) 왕은 이들의 충절을 기리고자 각자의 벼슬을 올려 주었으며 숙종 34년(1708)에 지방 사람들의 도움으로 `송담사`와 `송담서원`을 세워 이들의 위패를 모셔 두었다. 이후 고종 8년(1871)에 묘단(廟壇)을 설치하고 `사충단`이라 이름 짓고 비를 세워두었으며 매년 음력 4월 20일을 제사 일로 정하여 사충신을 추모하는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유공지정 (柳公之井) 원문  
柳公之井有井爲在金官府客館之前地非浚都之寒泉水非太華之玉井而混混而出寒洌可食矣.故老所稱柳公之井也.鳴乎異哉盖聞 國家龍蛇之難金官一城凜然在敵國之口何以外皆城所?也.城中舊無數靭之井所持而食者惟城外虎溪水耳.不意晉陽之保障反爲疎勒之排絶渴梅之望遠矣.探馬之術窮矣.將使一府殘命往索於招魚之肆而淮有智者不知所以爲齊謨也.時則柳公以無生之心親輓籠之役面溯窘窮而感格冥冥之聽手掘平地而挽回滾滾之源淸泉噴湧万口灌呼不待乞水於西河而已見澈?之洋洋矣.以是而謂之人謨可乎謂之鬼謨可乎無名可名故特謂之柳公之井至今數百載之下郵傳而不忘則盖柳公之不可能者城奴而不能者天乎今因後孫興燾在永君之請?書所成於此曰鏤刻于石系之以歌曰 井之水淵淵兮井之石磊石可?而水可洞兮柳公之名天壤俱發公諱滉字樂棲號樂吾云.都事聞韶金道和記主事金海金鍾太書

한글 해석  
유공지정유정위재금관부객관지전지비준도지한천수비태화지옥정이혼혼이출한렬가식의.고노소칭유공지정야.오호이재개문 국가용사지난김관일성늠연재적국지구하이외개성소유야.성중구무수인지정소지이식자유성외호계수이.부의진양지보장반위소륵지배절갈매지망원의.탐마지술궁의.장사일부잔명왕삭어초어지사이회유지자불지소이위제모야.시칙유공이무생지심친만롱지역면소군궁이감격명명지청수굴평지이만회곤곤지원청천분용만구관호불대걸수어서하이이견철부지양양의.이시이위지인모가호위지귀모가호무명가명고특위지유공지정지금수백재지하우전이부망칙개유공지부가능자성노이부능자천호금인후손흥도재영군지청동서소성어차왈루각우석계지이가왈 정지수연연혜정지석뢰석가륵이수가동혜유공지명천양구발공휘황자락서호락오운.도사문소금도화기주사금해금종태서

유공지정 (柳公之井) 해설  
금관부(김해) 객사 앞 샘이 있어 물이 깊지 않으면서도 차고 맑을 뿐 아니라 태평세대를 이끌어 백성들이 식수로 애음하니 옛 노인들이 유공지정(柳公之井)이라 불렀다. 오호라 특이하도다! 전해오기를, 나라에 큰 전란(戰亂)이 있어 금관(김해) 일대가 적들의 손에 포위되어 어찌할 바를 모를 때마다 이 샘이 울었다 한다. 또한 성 안에 여러 개의 옛 샘이 있었으나 모두 말라, 믿고 마실만 한 물은 성 밖의 호계천(虎溪川)의 물 뿐이었다. 뜻하지 않게 진양(晉陽)으로의 길도 막히고 속수무책으로 목 마른 매화처럼 멀리 하늘만 바라 볼 뿐 궁여지책 마저 없을 처지에 이르자 사또는 장차 남은 사람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물고기들이 떼 지어 사는 물길을 찾아 보라 명령했다. 비록 물길에 대해 좀 안다는 지혜로운 자가 있어도 그 곳을 알지 못 했고 또 꾀를 내지 못 했다. 그 때마다 유공(柳公)이 죽음을 각오하고 친히 역할을 맡아 성 주변을 찾아 나서서 땅을 두드리고 귀로 들으며 샅샅히 찾으니 하늘도 알고 감동하였는지, 맨 손으로 어느 한 곳의 평지 흙을 파내자 맑은 물이 용솟음쳐 흘러 내려 모두를 구제 하니 기뻐 환호하고 더 이상 서하 (西河 -서낙동강 )에서 물을 길어 올 필요가 없었다. 이는 마치 마른 웅덩이의 물고기가 맑은 물을 얻은 격이라, 이에 사람 들이 사람의 짓인가, 귀신의 짓인가 감탄하며 괴이한 이변과 柳公의 뜻을 기리어 이름 없던 샘을 특별히 유공정 (柳公之井)이라 일컬어 이름 짓고, 대대로 지금에 이르러 수 백 년이 흐르니 柳公의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한 정신을 되새기고 이를 기리기 위해 후손인 유흥도(柳興燾)와 재영(在永)군과 이를 기록하여 주기를 청하기에 글로 짓고 돌에 새겨 노래로 부르나니, 샘물은 영구히 연못에 이르고, 샘돌은 첩첩이 쌓아 물은 맑도다. 샘물은 가히 고을 사람들 살려내고,柳公의 명성도 함께 대대로 전해지네. 柳公의 諱는 滉이요, 字는 樂棲요, 號는 樂吾라 이른다.

都事(도사) 金道和 아름다운 소문 전해 듣고 글 짓고, 主事(주사) 김해 김씨 金鍾太 삼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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