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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동 유적과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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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동 유적과 전설
  • 이균성 기자
  • 승인 2008.08.03 14: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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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璞園) 정현석이 쓴 봉황대 표지 바위  
 

김해의 대표적인 봉황동 유적은 1907년 일본인 사학자 이마니시류(今西龍)에 의해 우리나라에서는 고고학상 처음으로 발굴된 회현리 패총과 금관가야 최대의 생활유적지인 봉황대를 합한 것으로 유적 제 2호로 지정되어 있다. 몇차례의 발굴조사를 거쳐 지금은 가야시대의 해상포구와 고상가옥, 주거지, 망루, 배 등을 재현해 놓았다. 현재 왕릉지로 추정되는 곳과 인접한 곳으로 대규모의 주거지와 방어시설은 물론 토기와 철기, 골각기가 발견되어 청동기시대 금관가야의 지배층이 거주한 지역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이곳에는 봉황대(鳳凰臺)라고 음각되어 있고 글자 왼쪽에는 박원(璞園)이라는, 글씨의 주인공인 듯한 사람의 호(號)가 보이는 바위가 있다. 봉황대라는 이름은 구릉이 마치 양쪽으로 날개를 단 듯 봉황의 모습을 하고 있어 부쳤다고 한다. 박원이란 인물은 1870년 김해부사로 부임해 파사석탑을 현재의 자리로 옮기고, 분산성을 개축하고, 김해향교를 중수했으며 수로왕릉에 있는 가락루와 정자각, 안향각 등을 보수하고, 제례에 사용되는 제기와 제복을 개량한, 김해의 문화와 유적보존에 각별히 열정을 쏟은 조선 고종 때의 정현석(鄭顯奭)이다. 강원도 횡성 사람으로 1817년(순조 17년) 나서 1899년 83세로 세상을 떴다.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보여(保汝), 호는 박원(璞園)이다.
봉황대 부근에는 이미 잘 알려진 것이지만 가야시대의 아름답고 순결한 사랑얘기가 담겨져 있는 황세바위가 있다. 바로 황세장군과 여의낭자의 이룰 수 없었던 애달픈 사랑이다. 죽어서야 비로소 서로의 마음을 나눌 수 있었던 두 사람의 서러운 혼(魂)이 바위로 남아 마주하고 있는 듯 하다. 때는 가야 제 9대 숙왕(492년에 즉위하여 521년까지 29년간 재위하였다. 겸지왕-鉗知王-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때 이야기.

 

   
 
  가야시대 고상가옥  
 

남대정동(南大政洞)에 사는 출정승과 북대사동(北大寺洞)에 사는 황정승은 후일 자식을 낳으면 서로 혼인하기로 약조를 한다. 뒷날 황정승은 아들 세(洗)를 낳고 출정승은 딸 여의(如意)를 낳는다.그러나 출정승은 마음이 변하여 딸 여의를 낳고도 아들을 낳았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여의를 아들처럼 키운다.황세와 여의는 서로 친구가 되어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다. 그러나 황세의 눈에는 아무래도 여의가 남자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여자인 것을 확인하기 위해 산에 올라 오줌을 누어보기도 하고 거북내(龜川)로 나가 멱감기도 해 본다. 황세의 끈질긴 노력에 결국 여의는 자기가 여자라는 사실을 실토하게 되고 둘은 사랑에 빠진다. 둘의 사랑을 지켜 본 두 정승도 마침내 서로 혼인을 시키기로 약속하게 된다. 그러나 행복했던 시절도 잠시...어엿한 장성으로 자란 황세는 가야를 침공한 신라군과의 전투에 나가게 되고 왕세는 이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다.

전투에서 이기고 돌아 온 황세에게 숙왕은 장군 벼슬을 내리고 자기 딸 유민(流民)과 혼인할 것을 권한다. 왕의 명이라 거절할 수도 없고...결국 황세는 유민공주와 혼인을 하게 되고 이에 절망한 여의는 황세를 그리워하다 결국 스물넷의 나이로 죽고 만다. 자기를 그리워하는 애달픔을 안고 여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황세는 여의에 대한 죄책감과 가슴에 묻은 사랑으로 방황하다 병을 얻어 죽게 된다.

황세와 여의가 죽음으로 사랑의 종말을 맞았다는 얘기를 들은 유민공주는 드디어 세속과의 인연을뒤로 하고 봉황대 맞은 편에 있는 지금의 임호산으로 들어 가 두 사람의 명복을 빌며 일생을 마치게 된다. 임호산은 예전에는 유민공주의 이름을 따 유민산으로 불리기도 했다. 훗날 사람들은 황세와 여의가 어린 시절 함께 놀던 개라암의 서남쪽과 동남쪽에 각각 작은 바위를 얹고 하나는 '황세돌', 다른 하나는 '여의돌' 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아래에는 여의각이 있는데 이는 1973년 회현동민들이 여의의 혼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매년 단오날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봉황동 유적지에 있는 황세바위

봉황대의 전설과 함께 찾아볼 수 있는 봉황동 유적에서는 가야의 시대적 생활상을 보여주는 유적과 더불어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특히 회현리 패총에서 나온 화천(貨泉)이라는 엽전처럼 생긴 동전은 서기 9년 왕망이 세운 새로운 국가에서 사용한 것으로 우리나라 황해도, 일본 큐우슈우(九州), 오사카(大阪) 등에서 출토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가야가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무역로의 중간지점에서 중개무역항 역할을 했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이는 봉황대 유적에서 가야시대 항구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뒷받침 한다. 인제대 이영식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해반천(海畔川)과 남쪽 봉황대 사이의 습지에 위치한 봉황대 유적에서 가야 시대 항구의 흔적이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경사면에 자갈을 깔아 배를 끌어올릴 수 있게 한 시설, 해반천 쪽 바닷물이 봉황대 쪽으로 범람하지 못하도록 목재와 석재를 점토에 섞어 다지고 군데군데 나무 못까지 박아가며 쌓아올린 기다란 둑 모양의 호안 시설, 그 안쪽에 늘어서 있던 높은 마루의 창고형 건물들, 항구를 관망하고 통제할 수 있는 망루 등이 발견되었다. 특이하게도 건물의 기초는 돌이 아닌 나무가 사용되어 창고 건물이 습지에 가라앉지 않도록 궁리했다는 설명이다.

바다를 지배한 고대 동아시아의 무역대국으로, 번창한 농경국가로 가야의 문화가 남아있고 아름답고 슬픈 사랑의 전설이 '하늘문' 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봉황동 유적으로 발걸음을 옮겨보는 것도 우리가 사는 김해의 역사기행과 더운 여름을 보내는 좋은 피서방법이 될 것 같다.

이균성 기자 kslee473@yn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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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사 2009-09-11 00:33:15
이러한 유적지 기행문은 계속되었으면 좋으련만 어찌 이 정도에서 멈추었는지?
분발을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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