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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불교 전래 지역 아유타에 대한 연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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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불교 전래 지역 아유타에 대한 연구<2>
  • 조현수 기자
  • 승인 2016.01.28 10: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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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역 경전에 나타난 음역어를 중심으로

▲ 인도 남부설

최근에는 가야불교 전래지인 아유타와 관련해 새로운 학설이 제기되고 있다.

즉 아유타는 인도 중부지역이 아닌 인도 남부지역이거나 스리랑카일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는 아직 국내 학계에서는 공론화되고 있지는 않지만, 논문 또는 여러 매체를 통해 소개되고 있다.

이에 본 항목에서는 그 주장의 내용을 파악해 보고 한역 불전에서의 아유타와 비교해 그 진위를 논구해 보고자 한다. 아유타의 인도 남부설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논문은 김정남의 `우리 한민족과 타밀족간의 언어 및 풍습의 유사성과 그 기원에 관한 연구`이다.

이 논문에서 논자는 가야불교의 전래지인 허황후의 고향인 아유타는 인도 남동부 타밀 나두주(州)의 주도 첸나이(영어 이름 마드라스) 동쪽 바닷가 마을인 아요디야 쿠빰(Ayodhya Kuppam)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그는 다음의 6가지를 그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첫째, 인도 북부의 아요디야는 히말라야산맥 아래 갠지스강 중류에 위치한다.

허황옥이 배를 타고 동아시아로 향하기 위해선 무려 1000㎞나 되는 강줄기를 따라 갠지스강 하류의 인도 북동부 캘거타까지 와서 벵골만의 바닷길로 나서야 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출발한지 얼마 안되었을 때 집채만한 파도가 금방이라도 배를 집어 삼킬 기세로 달려들기 시작해" 허황옥은 출발지로 되돌아가 부친을 만난다.

만약 갠지스강 중류에 있는 아요디야에서 출발했다면 갠지스강의 물줄기를 역류시켜 하류에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약 2000년 전의 항해 기술로는 쉽지 않은 일이다. `집채 만한 파도`도 바다에서나 일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허왕후가 서기 48년 벵골만에 속하는 인도 남동부 바닷가 마을 아요디야 쿠빰에서 배를 타고 동아시아를 향해 출발했다가 풍랑을 만나 되돌아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더욱 합리적이다.

 

   
 
  ▲ 명월사지에서 발견된 사왕. 아유타국과 가락국 불교 교류를 입증하는 귀중한 자료.  
 

둘째, 허왕후가 풍랑을 막고 항해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부친으로부터 받은 파사석탑(婆娑石塔) 문제도 있다. 약간 붉은빛의 반문이 있는 높이가 120㎝ 정도밖에 안되는 축소형 돌탑인데, 이 파사석이 인도의 내륙지방이 아니라 동부 바닷가 지역에서만 발견된다는 점이다.

셋째, 언어의 유사성이다. 허왕후가 가야의 초대 왕후인 만큼 가야 사람에게 자신의 고향 말을 전했을 텐데 인도 북부의 아요디야에서 쓰이는 힌디어와 우리말 사이에는 언어상 유사성이 거의 없다.

그러나 아요디야 쿠빰 및 타밀 나두주의 언어인 타밀어와 우리말 사이에는 유사점이 아주 많다. 타밀어와 우리말은 뜻글이자 소리글로서 완전히 같거나 아주 비슷한 단어가 수백개나 되고 어순도 같다. 허왕후가 자신의 고향말인 타밀어를 가야 사람에게 전해 그것이 고스란히 우리말에 남은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넷째, 타밀 나두, 안드레 프라데쉬, 카르나다카, 케랄라, 인도 남부 4개주에 집중 거주하는 드라비다인은 부계사회의 북부 아리안 인도인과는 달리 어머니의 성을 부여하는 등의 모계사회였다.

허왕후가 10명의 아들 가운데 2명에게 자신의 성인 허씨를 부여해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모계 성을 탄생시킨 것도 드라비다인의 모계사회의 일면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부분이다.

다섯째, 허황옥이 김해에 도착하여 보여준 비단바지 등은 아요디야 쿠빰과 근접한 당시 인도 최고의 비단생산지 칸치푸룸에서 구입했을 것으로 보인다.

비단바지뿐만 아니라 금수능라(錦繡綾羅:옷감)ㆍ의상필단(衣裳疋緞:의복류)ㆍ금은주옥(金銀珠玉:패물류)ㆍ경구복완기(瓊玖服玩器:장신구) 등 최고급의 결혼 예물은 아요디야 쿠빰에서 불과 70㎞가량 떨어진 칸치푸룸에서 생산된 것이다.

여섯째, 김수로왕릉과 인도 북부의 아요디야 힌두교사원에 있는 쌍어문양(雙魚文樣: 두 마리 물고기가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것)이 똑같다고 하여 아요디야 고향설을 뒷받침하고 있으나 물고기 무늬는 인도의 다른 힌두교 사원들 어디서나 볼 수가 있다.

물고기 무늬는 타밀인 등 드라비다족 전통의 문양이기도 하다. BC 1500년께 아리안족이 침입하기 전 인도 북서부 인더스강가에 드라비다족이 건설한 하라파(Harappa) 문명에서 물고기 문양이 사용됐다. 물고기 문양은 인도뿐만 아니라 스키타이족, 티베트, 몽골, 중국 등에서도 많이 나타난다.

따라서 인도 북부의 아요디야에서 물고기 무늬가 대거 발견된다고 해서 이것이 곧바로 허왕후의 출신지라고 단정하기에는 논리의 비약이 크다.

위와 같이 김정남은 위의 6가지 근거로 아유타가 인도 남부지역에 있었다고 주장하는데, 그의 주장은 확실히 기존의 견해를 뒤집는 획기적인 주장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의 주장이 모두 타당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의 논거는 세 번째 근거를 제외하고는 이미 기존 학자들에 의해서 논란되었던 바가 있다. 그리고 그 논란은 여전히 진행중이므로 여기에서 다시 그 문제들을 재론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김정남이 밝혔듯이 그는 아유타를 `라마야나`에서 나오는 코살라국의 수도이자 성소(聖所)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인도 및 동남아시아에서 언급되고 있는 아유타라는 지역이 이 아요디야에서 유래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라마야나`에 나오는 아요디야에 의해 인도 북부의 어느 지역이 아유디야라는 지명을 얻게 되었고 이후 인도의 여러 지역 등이 그 성소의 이름을 차용해 아유디야로 개명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이러한 주장을 따르자면 첫째는 인도의 어느 지역이 언제 아요디야라는 지명을 얻게 되었냐는 것이 입증되어야만 한다. 둘째는 허황후가 가야에 불교를 전한 것으로 되어 있음으로 당시 아요디야 꾸빰이 불교를 신봉하던 곳인가를 규명해야만 할 것이다.

 

   
 
  ▲ 김수로왕 신도비각 상단에 있는 태양문양 허왕비가 인도에서 올때 가져온 상징물로 전해져 오고 있다.  
 

▲ 기존의 주장과 음역어를 통한 차이점과 반론

본 항목에서는 위에서 서술한 아유타와 관련한 주장들 중에서 근본적으로 문제점을 가진 몇 가지를 중심으로 논구해 보고자 한다. 즉 기존 주장들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본 연구(한역불전 음역어를 통한 연구)를 통해 밝혀낸 내용들을 중심으로 하여 그 차이점이 무엇이며,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반론해 보고자 한다.

▲ 기존의 주장에 대한 재고

아유타와 관련한 기존의 주장은 대략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아유타의 지명과 전래에 관한 문제이다. 즉 본문의 내용을 보면 `아요디야`라는 지명은 부처님이 있을 당시에는 코살라국의 어느 도시에 불과했지만, 발미키가 기원전 2~3세기에 `라마아냐`를 완성할 당시 라마가 태어난 곳을 코살라국의 수도인 아요디야로 정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야요디야는 기원 후 5세기경 `라마아냐`가 인도에서 대중화됨에 따라서 사께따지역이 야요디야로 개명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근거로 5세기 초에 저작된 법현의 `고승법현전`에서는 사께따라는 지명이 나오지만, 아요디야라는 지명이 나오지 않은 것을 예로 들고 있다. 더불어 현장의 `대당서역기`에서는 이 사께따지역에 해당하는 곳을 아유타라는 이름으로 설명한다고 주장한다.

즉 이 주장은 `라마아냐`에 나오는 아요디야라는 가상의 지역이 신화의 대중화에 편승해 사께따라는 실제 지역을 아요디야로 개명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원전 5세기 전후에는 아요디야라는 지역명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인도 남부설을 보면, 아요디야 꾸빰 역시 `라마아냐`의 대중화에 편승되어 인도 남부의 어느 지역을 아요디야 혹은 아요디야 꾸빰으로 개명할 수 있는 여지는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광수가 주장하는 바의 아요디야는 5세기 이후에서야 비로소 실제적인 지명으로 불리는 반면에 김정남이 주장하는 바는 1세기 전후에 이미 아요디야라는 지명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덧붙이자면 이광수는 가야불교 전래와 관련한 허황후의 이야기는 일연이 `삼국유사`를 지을 당시 신라의 여러 여건과 결부되어 지어진 허구로 보는 것이다.

반면 김정남은 허황후의 이야기를 사실로 보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두 주장은 `라마아냐`의 이야기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라마아냐`의 성립과 발전 나아가 허황후 이야기의 사실과 허구라는 점에서 다른 관점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문제는 가야불교를 허황후가 전했냐는 것이다. 이에 이광수의 주장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허황후의 이야기는 후대에 각색된 허구라고 보기 때문에 아요디야에서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자체를 부정한다. 반면에 김정남은 허황후 이야기를 하나의 사실로 봄으로 그의 주장에 근거한다면 아요디야 꾸빰은 불교국가이거나 적어도 불교와 깊은 관계가 있는 지역이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김정남의 글에 따르면 당시의 아요디야 꾸빰은 지리적으로 해상무역을 할 수 있는 곳이라거나 허황후가 가져온 비단 등의 물품, 나아가 파사석이 생산되는 곳이라는 설명은 있어도 그곳이 불교와 관련된 나라 또는 지역이라는 설명은 없다. 즉 김정남은 `삼국유사`의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허황후가 해상루트를 통해 인도 남부에서 가야로 들어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여러 정황증거를 제시하고는 있지만, 어떻게 불교를 들여왔는가를 증명하지 못하고 있다.

▲ 음역어를 통한 차이점과 반론

위의 기존 주장과 관련해 한역 음역어를 중심으로 본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드러난다.

첫째, 아유타라는 지명과 전래에 관해 것을 보면 아유타라는 지명은 이미 초기 경전인 `잡아함경`에 나온다는 것이다. `잡아함경`이 어떤 경전이고 어떻게 전승되었는지는 부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고승법현전`과 관련해 한역된 시기가 `고승법현전` 보다 다소 이후이므로 이와 관련해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역된 시기로만 문제로 삼자면 `고승법현전` 보다 이전에 한역된 `불설수말소표경(佛說水沫所漂經)`에서는 아유타의 다른 음역어인 아영사(阿迎?)가 나온다. 따라서 이광수가 주장하는 바 아유타라는 지명은 5세기 이후에 사께따라는 지명이 `라마야나`의 영향에 의해 아유타로 불려졌다는 주장은 한역 음역어에 의하는 한 오류로 보인다.

둘째, 사께따와 아유타는 각기 다른 지명으로 초기 경전인 `잡아함경`에 이미 나온다는 것이다. 앞서 주장에 의하면 사께따가 아유타로 개명되었으므로 사께따와 아유타는 같은 지역이라고 주장했다.

 

   
 
  ▲ 가락불교 유물로 알려지고 있는 초선대 마애불.  
 

하지만 `잡아함경`에 의하면 아유타라는 지명은 아유타의 다른 음역어인 `아비타(阿毘陀)`와 `아비사(阿毘?)`로 각각 나올 뿐만 아니라, 사께따 역시 사기(娑祇) 또는 파기(婆祇)로 나오고 있다. 즉 한역 음역어에 의하는 한 아유타와 사께따는 다른 두 지역으로 설해지고 있으므로 같은 지역이라는 주장은 오류로 보인다. 또한 아유타가 인도남부의 어떤 지역일 것이라는 주장은 그 지역이 갖는 불교적 역사성이 전제되지 못한 추정으로 그 역시 문제점이 있다.

이에 한역불전에 근거한 아유타를 살펴보면, 우선 아유타는 위치적으로는 중인도에 속한다. 또한 부처님이 열반 하시기 전에는 자주 설법을 하거나 머문 곳이고 부처님이 열반을 한 이후에는 무우왕(無憂王)이 부처님의 머리카락과 손톱을 넣어 만든 탑과 네 분의 부처님이 경행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더불어 아유타에서는 세친과 그의 형인 무착이 각각 `구사론`과 `유가사지론`, `중변분별론` 등을 지은 곳이며, 경량부의 논사인 상좌 슈리라타가 `경부비바사`를 지은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아유타는 부처님 당시나 그 이후에도 불교와 아주 밀접한 불교 신봉지역임을 알 수 있다.

본 연구를 통해 논자는 가야불교 전래지로 추정되는 아유타와 관련해 3가지 학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논구했다.

첫 번째는 이종기의 `가락국탐사`를 기반으로 하여 가야불교의 전래지를 북인도 아유타로 보는 것이다. 이는 `가락국기`의 내용을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입장에서의 주장이다.

반면에 두 번째는 아유타라는 지명 자체가 `라마야나`의 신화에 근간을 둔 허구라는 것이다. 따라서 `가락국기` 자체도 역사적 사실이 아닌 하나의 허구로 보는 것이다.

끝으로 세 번째는 아유타가 북인도에 있었다거나 `라마야나`에 근거한 허구가 아니라, 남인도의 아유디야 꾸빰 혹은 그 일부 지역일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 역시 아유타라는 지명이 `라마야나`에서 유래한 것임을 인정하지만 지리적으로는 실재한 도시임을 주장하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본 연구를 통한 가야불교 전래지인 아유타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한역 불전에서의 아유타(阿踰陀)는 적어도 10개의 음역어를 갖고 있으며, 한자표기로는 14개가 된다. 따라서 아유타와 관련한 음역어를 추적한 결과 초기경전인 `잡아함경`에 이미 아유타의 음역어인 아비사(阿毘?)와 아비타(阿毘陀)가 나올 뿐만 아니라 사께따의 음역어인 사기(娑祇) 또는 파기(婆祇) 역시 나온다는 것이다.

이는 이미 아유타와 사께따가 공존했다는 증거로 사께따가 `라마야나`에 의해서 아유타로 되었다는 주장과 모순된다. 또한 사께따가 `라마야나`에 의해서 아유타로 되었다는 증거로 법현의 `고승법현전` 이전에는 아유타라는 지명이 없었다는 주장 역시 `고승법현전` 이전에 역경된 `불설수말소표경`에 아유타의 음역어인 아영사(阿迎?)가 나옴으로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본 연구를 통한 가야불교 전래지인 아유타는 초기불전에 실재하는 도시로 나올 뿐만 아니라 부처님과 관련한 여러 에피소드를 갖고 있는 불교 신봉지역임은 틀림없어 보인다. 따라서 가야불교가 인도 아유타로부터 전래되었다는 설은 그 과정의 맥락은 확신할 수 없지만, 적어도 허구적이지 않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근래 김해시가 과거 인도 아유타지역으로 추정되는 아요디야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김해박물관 앞 문화의 거리 2km를 `아유타로`로 지정하면서, 아유타에 대한 조명이 새롭게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본 논문에서 논구했듯이 아유타와 관련해서는 몇 가지 난제가 놓여 있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몇 가지 난제 때문에 지금까지의 성과를 무시하는 것 또한 적절한 태도는 아닐 것이다. 이에 가야불교 연구에 있어 가장 대표적인 학자인 김병모의 글을 대신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역사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다만 역사에게 말을 시키는 사람의 귀에게만 그 비밀을 들려줄 뿐이다. 잃어버린 역사, 가야불교는 이제 머지않아 우리의 곁으로 성큼 다가설 것이다. 가야사와 함께 가야불교의 인도 전래를 밝히려는 우리의 노력이 계속되는 한 역사는 굳게 닫아 있었던 침묵의 빗장을 열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황정일(동국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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