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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김해시 장유- 이 시대 마지막 유림장(儒林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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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김해시 장유- 이 시대 마지막 유림장(儒林葬)
  • 경상도 촌놈 조유식
  • 승인 2007.09.10 14: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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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재(華齋) 이우섭(李雨燮) 선생의 유림장(儒林葬) 영상

   
 
  ▶ 이 시대의 마지막 김해 유림장 사진으로 만났다.  
 

이 시대 마지막 영남 기호학파의 ‘거유(巨儒)’로 불리던 화재(華齋) 이우섭(李雨燮) 선생의 유림장(儒林葬)

조선시대 사대부 장례의 맨 앞에서 악귀를 쫓는 역할을 했던 방상씨(方相氏) 탈을 선두로 내세워 150여개의 만장과 상여가 뒤따르며 도심 속 전통 유림장을 재연했다.

특히 방상씨 탈은 이도열(61) 고성 탈박물관 명예 관장이 제작한 것으로 장례행렬 맨 앞에서 칼과 방패로 춤을 추고 길을 열어나가면서 악귀를 쫓는 역할을 재연해 눈길을 끌었다.

영남 기호학파의 ‘거유(巨儒)’로 지난달 20일 향년 76세를 일기로 타계한 화재 이우섭(華齋 李雨燮) 선생의 장례가 1000여 명의 유림과 문하생, 조문객, 일반 시민 등이 참석한 가운데 4일 전국 유림장(儒林葬)으로 거행됐다.

이날 유림장은 이 선생의 부친인 월헌 이보림(月軒 李普林·1902∼1972)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경남 김해시 장유면 관동리 덕정마을의 월봉서원(月峰書院) 앞에서 열린 발인제로 시작됐다.

상여와 200여 개의 만장으로 이뤄진 장례 행렬의 선두는 방상씨(方相氏) 탈을 쓴 사람이 이끌었다. 

장례 행렬은 월봉서원을 출발해 장지인 장유면 반룡산 선산까지 2km가량 이어졌으며 운구 중간에 장유면 하촌마을 입구, 고인의 선영에 있는 화산정사(華山精舍) 밑에서 두 번의 노제가 진행돼 고인의 넋을 기렸다.

하관 의식은 만장과 32명의 상두꾼이 멘 상여가 장지에 도착하고 방상씨 탈을 쓴 사람이 묘지의 귀퉁이를 창으로 찔러 보며 악귀를 쫓은 뒤 진행됐다. 혼령을 신주(神主)로 옮길 때 행하는 제주제(題主祭)와 산신에게 고인을 잘 보살펴 달라는 의미의 산신제(山神祭)도 열렸다.

임용순(76) 호상(護喪·장례위원장)은 “이번 장례식은 조선시대 500년 동안 선대에서 내려온 전통 의식을 이어받아 초상이 난 달을 넘겨 장례를 치르는 유월장(踰月葬)으로서의 의미가 크다”며 “이우섭 선생은 율곡 이이, 우암 송시열 선생의 학맥을 이어받아 성리학 등 다방면에서 많은 후학을 길러낸 학문과 덕망이 높은 유학자였다”고 애도했다.

이우섭 선생은 평생 고향에서 월봉서당을 지키면서 한학을 가르치고 ‘화재문집(華齋文集·전 27권)’ 등 40여 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이 시대 마지막 영남 기호학파의 ‘거유(巨儒)’로 불리던 화재(華齋) 이우섭(李雨燮) 선생의 유림장(儒林葬)

조선시대 사대부 장례의 맨 앞에서 악귀를 쫓는 역할을 했던 방상씨(方相氏) 탈을 선두로 내세워 150여개의 만장과 상여가 뒤따르며 도심 속 전통 유림장을 재연했다.

특히 방상씨 탈은 이도열(61) 고성 탈박물관 명예 관장이 제작한 것으로 장례행렬 맨 앞에서 칼과 방패로 춤을 추고 길을 열어나가면서 악귀를 쫓는 역할을 재연해 눈길을 끌었다.

영남 기호학파의 ‘거유(巨儒)’로 지난달 20일 향년 76세를 일기로 타계한 화재 이우섭(華齋 李雨燮) 선생의 장례가 1000여 명의 유림과 문하생, 조문객, 일반 시민 등이 참석한 가운데 4일 전국 유림장(儒林葬)으로 거행됐다.

이날 유림장은 이 선생의 부친인 월헌 이보림(月軒 李普林·1902∼1972)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경남 김해시 장유면 관동리 덕정마을의 월봉서원(月峰書院) 앞에서 열린 발인제로 시작됐다.

상여와 200여 개의 만장으로 이뤄진 장례 행렬의 선두는 방상씨(方相氏) 탈을 쓴 사람이 이끌었다. 

장례 행렬은 월봉서원을 출발해 장지인 장유면 반룡산 선산까지 2km가량 이어졌으며 운구 중간에 장유면 하촌마을 입구, 고인의 선영에 있는 화산정사(華山精舍) 밑에서 두 번의 노제가 진행돼 고인의 넋을 기렸다.

하관 의식은 만장과 32명의 상두꾼이 멘 상여가 장지에 도착하고 방상씨 탈을 쓴 사람이 묘지의 귀퉁이를 창으로 찔러 보며 악귀를 쫓은 뒤 진행됐다. 혼령을 신주(神主)로 옮길 때 행하는 제주제(題主祭)와 산신에게 고인을 잘 보살펴 달라는 의미의 산신제(山神祭)도 열렸다.

임용순(76) 호상(護喪·장례위원장)은 “이번 장례식은 조선시대 500년 동안 선대에서 내려온 전통 의식을 이어받아 초상이 난 달을 넘겨 장례를 치르는 유월장(踰月葬)으로서의 의미가 크다”며 “이우섭 선생은 율곡 이이, 우암 송시열 선생의 학맥을 이어받아 성리학 등 다방면에서 많은 후학을 길러낸 학문과 덕망이 높은 유학자였다”고 애도했다.

이우섭 선생은 평생 고향에서 월봉서당을 지키면서 한학을 가르치고 ‘화재문집(華齋文集·전 27권)’ 등 40여 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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