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매일 PDF 지면보기
과월호 호수이미지
과월호 호수이미지
과월호 호수이미지
과월호 호수이미지
과월호 호수이미지
과월호 호수이미지
최근 김해종합뉴스
행복1%나눔재단 희망캠페인
함께해요 나눔운동
時도 아닌 것이
행복밥집
TV 방송 영상
커뮤니티
다시보는 부끄러운 김해 현장
김해생명고 역사관 개관 6.25참전 학도병 회고사
상태바
김해생명고 역사관 개관 6.25참전 학도병 회고사
  • 영남방송
  • 승인 2009.02.03 16: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 정 환씨.  
 
오늘 역사적이고 뜻깊은 김해농업학교(김해생명과학고등학교)80년 역사관 개관식 및 6.25전쟁 학도병 참전기념비 제막식에 즈음하여 우리 모두는 그 동안 시종 이 일의 추진에 심혈을 기울여 모든 난관과 애로를 극복하고 오늘 웅장한 모습을 보여주게 한 최동훈 동창회장님을 비롯한 추진위원님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또한 여러모로 협조와 애를 써 주신 많은 분들에게도 사의(謝意)를 표하면서 이 비(碑)가 모교의 심장부에 자리하여 웅자를 뽐내고 서서 사랑하는 재학생 후배들에게는 애교심과 애국심 함양의 상징적 표상이 꼭 되어 줄 것으로 믿으며 새겨놓은 비문과 명각되어 있는 출정학도들의 영예로운 이름들이 천추만대에 빛날 것으로 믿으면서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이 비에 새겨져 있는 저희들의 참전학도병들은 국운이 백척간두에 놓여있던 1950년 8월초에검은 교복을 입고 청운의 꿈을 안고 열심히 상아탑을 쌓아올리던 그 시기에 정들었던 교실과 교정을 뒤로하고  펜 대신 총대를 잡고 전선으로 투입 되었습니다.

그때의 저희들은 7월 하계방학중이라, 농교실습담에서 '논메기'  작업을 마치고 각자 고향집에 가서 며칠동안 쉬고 있었고 본교와 동광초등학교에는 육군 9연대가 전쟁에 밀려와 본교 보충부대 재편성 차 주둔하고 있었으며 비상소집 당한 저희들은 동광교 어느 교실 한 모퉁이에다 정들었던 교복은 벗어 던지고 품에 맞지 않는 푸른 군복으로 갈아 입게 되고 가슴에는 학도호국단 휘장인 '금새마크'  하나만 달고 전장으로 출정이란 장도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6.25전쟁이 한반도의 고요한 최남단 김해에서도 '우리 김해농고 학도병출전' 이라는 처절한 비상사태에서부터 실감하게 했습니다.

어느 곳 어느 전선으로 보내져서 노도와 같이 밀려오는 괴뢰군의 희생이 될 지도 모르고 징집되어 보내지는 내 사랑하는 아들들의 마지막 뒷모습을 한 번이라도 더 지켜보려고 애쓰고 애쓰는 그 처절한 모정들...

 “아무게야! 아무게야! 꼭 이겨서 무사히 살아오라!”고 목이 터지라 불러대는 어머니들의 마지막 목소리를 가슴에 새겨담고 "정든 모교 김농아! 학우야! 김해야! 김해야! 우리 꼭 이겨서 돌아오마!“ 이 한마디를 남기고 저희들은 떠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징발당한 K.T.C(김해화물자동차회사)의 낡은 '트럭' 적제함에 실린 우리 학도병들은 8월의 그 폭염하에 구포다리 뚝 위에서 메마른 '주먹밥'  한 덩어리에 점심끼니를 때우고 야음을 이용하여 움직이기 시작한 병력수송 비상기동열차에 실려 북으로 북으로 간 곳이 겨우 대구의 모 방직회사 광장이었습니다. 당시 대구시내의 모습은 전쟁이 처참함을 말해주었습니다.

북쪽에서 밀려오는 아비규환의 피난민떼들/ 전선에서 목숨 걸고 싸우다 밀려온 흩터러진 군인들/ 피난 봇짐을 안고 거리의 동정만 살피는 시민들.  이 모든 것들이 전시하에 후방도시 거리의 상황의 편편이었습니다.

대구에서의 우리 학도병의 하루는 실탄사격연습과 분대전투 훈련으로 아홉발의 MI소총사격연습을 마지막으로 하여 8월 6일 새벽4시 낙동강 최전방인 '최후의 보루' 인 왜관,  다부동, 영천지구, 팔공산전투, 안강기계, 포항 형상강 전투에 투입되어 이름 모를 조국의 산야에서 최후의 그 날까지 목숨을 초개와 같이 조국에 바친 수많은 전우들의 흘린 피는 산야를 붉게 물 들이고 낙동강물은 핏물로 흘러내리게 했습니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은 없다, 낙동강 진지 사수하라!” 이것이 소위 '낙동강 전선 50일간의 버팀'입니다.  이와같이 우리들은 낙동강 전선 '최후의 보루'를 사수 했던 것입니다. 이 전투가 전세를 역전시켜 한강 이남의 실지회복과 9.28 수도서울, 탈환의 중대한 동기가 되었습니다.

전쟁의 극한적 상황속에서는 한 사람의 병원(兵員)이 더 필요했고 한 자루의 총대가 더욱 힘이였습니다. 학교장의 '학생비상소집명령'이 전장으로 까지 투입 되어야만 하는 비정상적인 사태가 다시는 우리 역사에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천인공노할 북괴의 남침으로 인한 6.25한국전쟁은 3년1개월 2일 만인 1953년 7월27일. 휴전이 성립되어 이제 59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만 국토는 아직도 두 동강이 나 있고 민족은 서로 갈라져 있습니다.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김해생명과학고등학교의 사랑하는 후배들이여! 우리 모두는 애국심이 투철하고 애족심이 강렬한 조국평화통일 성취의 위대한 역군이 되어 달라는 간절한 염원과 함께 참전학도병의 영예가 영원 무궁토록 3m가 넘는 이 거대한 참전기념비의 비신에 새겨 영원히 승계되어 빛나게 가꾸어 지도록 간절하게 당부드립니다.

끝으로  나라에 목숨 바쳐 유명을 달리한 학우들의 명복을 빌며 우리들 소회의 일단을 부치면서 회고사로 줄입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2009년 2월 3일 김해농업학교(김해생명과학고등학교)  6.25참전 학도병 대표 이 정 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