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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 영욕의 50년…이렇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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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 영욕의 50년…이렇게 살았다
  • 영남방송
  • 승인 2009.06.27 15: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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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팝 황제’ 마이클 잭슨(50)이 25일(현지시간) 사망했다.

로스앤젤레스 검시관 프레드 코랠은 이날 CNN을 통해 마이클 잭슨이 심장박동이 완전히 멈춘 채 병원에 도착, 의사들에 의해 사망 판정을 받았다고 밝혔다.

수많은 히트곡을 남긴 마이클 잭슨은 명실상부한 ‘팝의 황제’였다. 아동 성추행, 성형 중독 등 각종 스캔들로 홍역을 치렀지만 음악적 명성만큼은 흠이 가지 않았다.

잭슨의 음악 인생은 5살 때부터 시작됐다. 형제들과 5인조 그룹 ‘잭슨 파이브’를 결성, 리드보컬을 맡아 음악적 재능을 뽐내며 팝계에 데뷔했다. 1976년 ‘잭슨스’로 이름을 바꾼 이 그룹에서 1984년까지 활동했다.

마이클 잭슨은 1971년 ‘갓 투 비 데어(Got To Be There)’로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1979년 발표된 ‘오프 더 월(Off the Wall)’ 음반은 전 세계적으로 1,780만 장이나 팔렸다.

특히 1982년 발표된 ‘스릴러(Thriller)’는 잭슨을 ‘팝의 황제’로 군림하게 만들었다. 음반에 수록된 9곡 중 무려 7곡을 빌보드 차트 톱 10에 올려놓았다. ‘빌리 진(Billie Jean)’의 뮤직비디오가 MTV로 공개되면서 그의 ‘문-워크 춤’이 전 세계에 유행되기도 했다. 음반은 무려 6,000만여 장이나 팔렸다.

1990년과 1996년 ‘그래미 어워드 최우수 뮤직비디오상’을 수상하는 등 매번 음반을 발표할 때마다 각종 상을 휩쓸었다. 2001년에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의 ‘공연자’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음악적 명성과 달리 삶은 순탄치 않았다. 1994년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인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결혼했지만 2년 만에 결별했다. 간호사 데비 로와 두 번째 결혼도 3년 만에 끝났다.

1990년대에는 ‘아동 성추행’ 사건으로 곤욕을 치렀다. 2005년 법원에서 무혐의 판결을 받았지만 한번 실추된 명성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올 초에는 파산 가능성으로 자신의 대저택 ‘네버랜드’가 압류당할 위기에 처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또 백반증이라는 희귀병으로 고생했다. 피부를 햇빛에 노출시킬 수 없어 항상 선글라스를 끼고 긴팔 옷을 입고 다녔다. 잦은 성형 수술로 인해 심한 부작용에 시달리기도 했다.

잭슨은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1996년 첫 내한 공연을 펼친 잭슨은 1999년 6월 서울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서 ‘마이클 잭슨과 친구들’이란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세계전쟁희생자와 불우 어린이를 돕기 위한 자선공연이었다.

잭슨은 7월 13일부터 2010년 3월까지 영국 런던에서 컴백 콘서트를 열 계획이었다. 50차례로 예정된 런던 재기 공연 티켓은 발매된 순식간에 매진될 정도로 팬들은 그의 복귀를 반겼다.

최근 여러 해 동안 잭슨의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런던 콘서트의 주관사인 AEG 라이브는 3월 잭슨이 4시간30분에 이르는 신체검사를 무난히 통과했다며 별다른 이상이 없는 것으로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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