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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불교 최대 종파 '대한불교조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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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불교 최대 종파 '대한불교조계종'
  • 조유식 취재본부장
  • 승인 2012.04.06 12: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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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단협의회 회원 종단-1

한국불교는 통불교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통불교는 한 종파에만 국한하지 않고 불교 전체에 통하는 교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조계종의 명칭을 사용하게 된 것과 그 뜻을 같이 하고 있다. 우선 삼국시대 불교가 우리 나라에 전래되었을 때, 중국을 통하여 유입된 불교는 경전을 통하여 그 뜻을 삼는 교학 불교(교종)와 선정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불교(선종)로 나뉘어져 있었다.

삼국시대에는 경전을 중심으로 한 불교가 유행하다가 통일신라 이후 중국에서 유학하고 돌아 온 유학승에 의해 선의 수행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당시 신라는 경전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가 성행하였으므로 선종이 설 자리는 별로 없었습니다.

이에 선사들은 산으로 들어가 절을 세우고 산문을 열었는데 이 중 대표적인 9개의 산문을 구산선문이라고 하고 이것은 고려 초기가 되서야 완성을 이루었습니다. 통일신라 이후 중국에서 유학하고 돌아 온 유학승에 의해 선의 수행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당시 신라는 경전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가 성행하였으므로 선종이 설 자리는 별로 없었다. 이에 선사들은 산으로 들어가 절을 세우고 산문을 열었는데 이 중 대표적인 9개의 산문을 구산선문이라고 하고 이것은 고려 초기가 되서야 완성을 이루었다.

그렇다고 그 이전에 선의 형태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원효스님의 행적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 선의 기원은 신라시대 도의국사(道義國師)가 개산한 가지산문에서 기원하고 있다. 이렇게 고려시대에 접어들면서 불교는 보조국사의 정혜결사 운동과 대각국사의 교관일치(敎觀一致)의 선교통합운동, 고려 중기에서 말기로 이어지는 수선사·백련사 결사운동, 임제종의 유입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임제 법통을 이어 선교양종의 회통이 있었다.

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은 신라시대 때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이며 도의국사(道義國師)가 개산(開山)한 가지산문(迦智山門)에서 기원하며, 고려시대 보조국사(普照國師)의 중천(重闡)을 거쳐, 태고 보우국사(太古普愚國師)가 구산(九山)을 통합하여 조계종이라 한데서 연유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배불정책의 결과로 명맥을 유지하면서 선교양종(禪敎兩宗)의 팔도도총섭제도(八道都總攝制度)가 임진왜란 때까지 지속되었다. 청허휴정의 선중흥에 의해 활기를 띄기 시작한 불교는 조선후기에는 백파와 초의의 선논쟁으로 한국불교의 새로운 활로를 열기도 했다.

그 후 구한말 까지는 남북총섭시대(南北總攝時代) 선종과 교종이 양립하여 선종은 조계종, 천태종, 총남종으로 교종은 화엄종, 자은종, 중신종, 시흥종으로 되었다. 1911년 일제에 의하여 사찰령(寺刹令)이 제정되어 31본산(本山)제도가 생겨나고 선·교 양종의 명칭이 사용되었다.

1913년에는 31본산 연합사무소 위원장제도가 실시되다가 1923년에 재단법인 조선불교 중앙교무원 이사제도로 되었으며, 1924년에 이르러 선·교 양종을 통합하여 조선불교조계종이 설립되었다. 그 당시 총 본산은 지금의 조계사인 태고사(太古寺)에 설치되었으며, 31개 본산의 주지는 조선총독이 인가하였고, 말사 1,300여 개소의 주지는 도지사의 인가를 받아야 했다. 이것은 일제의 식민지가 된 우리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해방 이후 대한불교조계종으로 출발하였으나 1954년부터 1962년까지는 비구·대처 승려간의 분규로 불교정화운동이 계속되었다. 불교정화운동의 결과로 1962년 4월에 비구·비구니 만을 인정하는 통합종단으로서 대한불교조계종이 재발족하였다.

이렇게 어렵게 다시 시작한 대한불교조계종은 1980년 10·27 법난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기도 했지만 하나의 힘으로 그 고통을 이겨내기도 했다. 1994년 4월 10일에는 종단개혁의 의지를 담은 전국승려대회가 조계사에서 열렸다.

전국승려대회의 산물로 개혁종단이 출범하였고, 개혁종단으로 출발한 지금의 대한불교조계종은 승가본연의 수행과 정진을 다하고 밖으로는 중생교화에 노력함으로써 부처님이 말씀하신 직지인심, 견성성불, 전법도생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한국선문의 초조(初祖)이며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조인 도의원적국사(道義元寂國師)는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중기에 이르는 시기에 종문의 씨앗을 뿌려 우리역사를 장엄하였습니다.

 

   
 
     
 

스님의 생몰연대(生沒年代)는 확실치 않으며 784년(선덕5)에 입당하여 821년(헌강왕13) 귀국하기까지의 구법기로 국사의 생존기를 추정할 뿐입니다.

속성은 왕씨(王氏), 법명(法名)은 원적(元寂) 또는 명적(明寂)이라고도 합니다. 중국(中國)에서 서당지장선사(西堂智藏禪師)로부터 선법(禪法)과 함께 도의(道義)라는 법호를 받았습니다.

어느 날 국사어머님께서 한 스님이 찾아와 함께 앉아있는 태몽(胎夢)을 꾼 다음 39개월만에 지금의 서울인 북한군(北漢郡)에서 탄생하였습니다. 선사(禪師)께서는 단정한 용모(容貌)에 천품(天品)이 총명하여 한 가지 일로 백 가지를 통찰하는 지혜를 갖추었으며, 동진(童眞)으로 출가(出家)하였습니다.

일찍이 교문(敎門)에 수학하고는 구법(求法)을 위해 784년(선덕왕5) 입당(入唐)하였습니다.

먼저 오대산 문수도량(五台山 文殊道場)을 참배하는 순간 공중(空中)에서 범종(梵鐘)이 울리고 산정(山頂)의 신조(神鳥)가 높이 나는 영서(靈瑞)를 감득(感得)하였습니다.

이어 6조혜능의 단경설처(壇經說處)인 광주(廣州) 보단사계단(寶壇寺戒壇)에서 비구계(比丘戒)를 받은 후(後), 육조(六祖)스님의 영당(影堂)에 참배코자 광동조계산보림사(廣東曹溪山寶林寺)로 찾아가 예배(禮拜)하려는 순간 영각문(影閣門)이 홀연히 열려 스스로 맞이하였으며 참배후 문(門)또한 스스로 닫히는 이서(異瑞)를 감득(感得)하였습니다.

그 길로 강서성 홍주 개원사(江西省 洪州 開元寺)로 혜능대사(慧能大師)의 증손(曾孫)이며 마조(馬祖)스님의 제자(弟子)인 서당지장(西堂智藏)선사(735~814)를 찾아 문법(問法)하니, 모든 의체(疑滯)가 마치 눈 녹듯 풀려 돌 속에서 미옥(美玉)을 캐고, 조개 속의 진주(眞珠)를 얻은 것과 같았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 지장선사(智藏禪師)께서 ‘참으로 법(法)을 전수(傳授)할 만한 자 이 사람이 아니고 또 누구이겠는가!’라 찬탄하고는 도의(道義)라는 법호와 함께 육조정맥(六祖正脈)의 선법(禪法)을 전하였으니 이것이 달마선맥(達磨禪脈)이 신라(新羅)로 넘어오는 기연(機緣)이 되었습니다.

한동안 지장(智藏)의 회하에 주석하다가 하직하고 사형(師兄)인 강서성 봉신현(江西省 奉新縣)에 있는 백장회해선사(百丈懷海禪師)를 참방(參訪)하고는 서당(西堂)스님과의 기연(機緣)을 알리니 이를 들은 백장(百丈)스님이 찬탄(讚歎)하되 ‘강서(마조)江西(馬祖)의 선맥(禪脈)이 모두 동국(신라)東國(新羅)의 스님에게로 귀속(歸屬)하였구나!(강서선맥 총속동국지승여)(江西禪脈 摠屬東國之僧歟)’라고 찬탄하였으니 조계(曹溪)의 법통(法統)이 도의선사(道義禪師)를 통해 우리나라에 전(傳)하여짐을 칭송한 것입니다.

스님께서 삼칠년(三七年)동안 당(唐)나라에서 체류(滯留)하다가 821년(헌덕왕13)에 귀국하여(전거미상)(典據未詳) 선법(禪法)을 펴고자 하였으나 신라(新羅)에 불교(佛敎)가 전래(傳來)된지 이미 삼백여년(三百餘年)이 지났어도 교문(敎門)의 울타리를 넘은 일이 없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시절인연(時節因緣)이 성숙(成熟)되길 기대하며 설악산진전사(雪岳山陳田寺)에 주석(住錫)하다가 제자(弟子)인 염거선사(廉居禪師)에게 심인(心印)을 전수(傳授)하고 입적(入寂)하였습니다.

염거화상(廉居和尙) 역시 선법(禪法)을 전해 받았으나 펴지 못하고, 그의 제자(弟子)인 보조체징선사(普照體澄禪師)에게 전하였고, 보조(普照)스님께서 드디어 859년(헌안왕3) 헌안왕(憲安王)의 후원(後援)을 받아 장흥보림사(長興寶林寺)를 창건하고 도의국사(道義國師)가 전(傳)해온 선풍(禪風)을 크게 진작(振作)하였으니, 청도운문사·군위인각사·언양석남사(淸道雲門寺·軍威麟角寺·彦陽石南寺)등을 아우르며 선문(禪門)의 큰 파도를 일으킨 가지산파(迦智山派)를 형성(形成)하였습니다.

오늘의 한국불교(韓國佛敎)가 조사선문(祖師禪門)의 종토(宗土)가 되고, 조계종(曹溪宗)이 또한 종문(宗門)의 혈맥(血脈)을 이어 오늘에 이르고 있음은 실로 종조(宗祖)이신 도의국사(道義國師)의 구법전승(求法傳承)으로 실참실수(實參實修)한 은혜(恩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조사선풍(祖師禪風)은 사자상승(師資相承)의 실다운 전통에서만이 전승(傳承)될 수 있습니다. 신명(身命)을 다해 섬기는 스승들과 목숨을 다해 배우는 제자들이 동행(同行)할 때 종문(宗門)은 반드시 중흥(中興)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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