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매일 PDF 지면보기
과월호 호수이미지
과월호 호수이미지
과월호 호수이미지
과월호 호수이미지
과월호 호수이미지
과월호 호수이미지
최근 김해종합뉴스
행복1%나눔재단 희망캠페인
함께해요 나눔운동
時도 아닌 것이
행복밥집
TV 방송 영상
커뮤니티
다시보는 부끄러운 김해 현장
오대양의 저주인가? 사이비종교의 음모인가?
상태바
오대양의 저주인가? 사이비종교의 음모인가?
  • 특별 취재팀
  • 승인 2014.04.21 20: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세월호의 실소유주는 (주)세모의 아들들이다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한 여객선 세월호의 선사인 청해진 해운에 드리워진 역사의 그림자가 심상치 않다. 전두환 군사정부 시절 발생한 오대양 집단 사망 사건에 뿌리가 닿아 있다. 권력과 종교, 돈과 폭력이 뒤엉킨 끝에 32구의 시신을 남긴 사건이다.

청해진 해운의 실소유주인 유혁기 씨와 유대균 씨는 유병언 전 (주)세모 회장의 아들들로 청해진 해운의 실제 주인으로 알려지고 있다.

유 전 회장은 특정 종교 목사이기도 한데 이 교파는 (주)오대양이라는 집단과 긴밀한 관계였다. (주)오대양은 기업이면서 동시에 종교집단인데, 사장이자 교주인 박 모 씨는 1987년 8월 29일 오대양 용인공장에서 다른 신도들과 함께 시신으로 발견됐다.

당시 오대양 용인공장 공장장 이 모 씨는 대들보에 목을 매어 숨진 상태였고, 박 씨를 포함한 31구의 시체는 식당 겸 다용도실 천장 바닥에서 목을 맨 채 누워 있거나 2~3구씩 포개진 채로 죽어 있었다.

이를 놓고, 자살인지 타살인지에 대해 격렬한 논란이 일었다. 이는 전두환 군사정부 시절 발생한 대표적인 의혹 사건으로 꼽힌다.

당시 군사정부 실세와 (주)오대양의 유착설이 있었다. 박 씨의 남편인 고위 공무원은 이 사건과 무관하다는 게 당시 수사기관의 발표였으나, 이에 대해서도 의혹이 따랐다.

집단 사망 사건에 앞서 오대양 교주 박 씨가 약 170억 원을 빌린 뒤 갚지 않았고, 이에 항의한 채권자가 감금 폭행당했다.

박 씨가 떼먹은 돈 170억 원의 행방을 찾던 당시 수사기관은 이 돈이 유병언 전 세모 회장이 속한 교단으로 흘러갔다고 봤고, 교단 목사를 겸하고 있던 유 전 회장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판단했다.

결국 유 전 회장은 1991년 사기죄로 구속됐다. 이후 (주)세모는 경영난을 겪었으며 1997년 부도를 맞았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Dart)에 따르면, 세월호 선사인 청해진 해운은 조선업체인 천해지의 지배를 받고, 천해지는 지주회사인 아이원아이홀딩스의 지배를 받는다. 그리고 아이원아이홀딩스의 최대주주가 유 전 회장의 아들들이다.

청해진 해운은 건강식품 판매업체 등을 운영하는 아이원아이홀딩스의 손자회사로 밝혀졌다. 아이원아이홀딩스는 1980년대 한강유람선을 운영했던 주식회사 세모 유병언 전 회장의 아들인 유모 씨 형제가 소유한 회사다.

유 전 회장은 `구원파`로 알려진 기독교복음침례회 목사 출신으로, 1987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오대양 집단변사` 사건의 배후로 지목됐던 인물이다. 유 전 회장 일가가 최대주주인 아이원아이홀딩스는 청해진 해운 등 7개 회사를 거느리고 연간 3000억 원대 매출을 올리고 있는 회사다.

1987년 8월 29일 경기도 용인시 남사면에 있는 오대양(주)의 공예품 공장 식당 천장에서 오대양 대표 박순자(朴順子)와 가족ㆍ종업원 등 신도 32명이 손이 묶이거나 목에 끈이 감긴 채 시체로 발견된 사건을 말한다.

수사 결과 오대양 대표이자 교주인 박순자는 1984년 공예품 제조업체인 오대양을 설립하고 종말론을 내세우며 사교(邪敎) 교주로 행세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박순자는 자신을 따르는 신도와 자녀들을 집단시설에 수용하고 신도들로부터 170억 원에 이르는 거액의 사채를 빌린 뒤 원금을 갚지 않고 있던 중 돈을 받으러 간 신도의 가족을 집단 폭행하고 잠적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이 발생했을 때에는 집단 자살의 원인이나 자세한 경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은 채 수사가 마무리되었다. 그러다가 1991년 7월 오대양 종교집단의 신도였던 김도현 등 6명이 경찰에 자수하면서 사건의 의문점들이 얼마간 밝혀졌다.

자수자들의 진술에 따라, 이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을 것으로 경찰이 추정하고 있던 오대양 총무 노순호와 기숙사 가정부 황숙자, 육아원 보모 조재선 등 3명이 자살사건 전에 이미 계율을 어겼다는 이유로 오대양 직원들에게 살해당한 뒤 암매장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따라 사건이 전면 재조사에 들어갔지만, 이 사건이 경찰의 발표대로 집단자살극인가, 아니면 외부인이 개입된 집단 타살극인가에 대한 논의만 무성했을 뿐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부검 의사는 3구의 시체는 자살이 분명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교주 박순자를 포함한 나머지 사람들은 교살(絞殺)에 의한 질식사가 분명하며, 누군가에 의해 계획적으로 행해진 집단 타살 극이라고 주장하였다.

1987년 8월 29일 토요일, 가을을 재촉하는 빗줄기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는 가운데 경기도 용인군 남서면 북리 (주)오대양 용인공장에서 남녀 시체 32구가 발견되어 전 국민을 경악하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오대양 용인공장의 공장장 이강수는 대들보에 목을 매어 자살해 있었고 오대양의 사장이자 세칭 오대양교의 교주로 알려진 박순자를 비롯하여 31구의 시체는 식당겸 다용도실 천장 바닥에서 목을 맨 채 누워 있거나 2, 3구씩 포개진 시체로 죽어 있었다.

경기도경, 용인경찰서의 베테랑 형사들이 대대적으로 투입되었고 매스컴은 취재 경쟁을 벌이면서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세칭 (주)오대양 사장 박순자. 그녀는 당시 48세로 많은 사채를 끌어들여 공장을 설립하고 종말론으로 신도들을 현혹했다.

`세상이 말세가 되었는데 오대양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 `전세계 오대양은 내가 주관한다`, `오대양을 떠나면 죽음의 재앙을 받는다`라고 설파하여 신도들이 자신을 하느님처럼 숭배하게 만들었다.

박순자는 오대양의 신도들을 집단으로 합숙생활을 하게 했으며 배신자는 가혹하게 린치를 가하는 등 강력한 카리스마로 신도들 위에 군림했다. 박순자는 많은 사채를 끌어들이고 채권자들에게 빚을 갚지 않아 물의를 일으켰다.

1987년 8월 16일 주유소를 경영하는 이상열(가명)이 박순자에게 빌려준 5억 원을 받으러 갔다가 오대양 직원들에 11시간 동안이나 감금을 당하면서 돈을 포기하라는 각서를 강요당한 뒤에 풀어준 사건이 발생했다.

이상열은 즉시 경찰에 신고하여 이상열을 폭행한 오대양 직원 13명을 구속했다. 이상열의 단순 폭행사건에서 거액 사기사건으로 발전한 것이다. 경찰은 박순자의 행방을 집중적으로 추적하기 시작했다.

8월 28일 한 채권자가 오대양 용인공장에 잠적되었던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제보를 했다. 충남 경찰은 오대양 공장을 기습하여 어린이 19명 등 49명을 발견하여 대전으로 데리고 왔으나 천장에 숨어 있던 박순자 등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이 사건의 미스터리는 여기에 있다.

오대양 공장을 기습한 경찰이 천장에 있었던 것으로 경찰이 추정한 박순자 등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박신자를 비롯한 31구의 시체가 외부에서 옮겨졌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언론에서는 오대양사건을 집단자살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사실상 명백한 살인사건이었다.

경찰의 추정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교주인 박순자는 집단 도피가 한계에 이르렀고 자살을 하자고 충동을 한 뒤에 먼저 자살을 하고 나머지 신도들이 뒤따라 자살을 동의했다는 것이었다. 그 증거로 31구의 시신이 전혀 반항한 흔적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도 맞지 않는다.

천장에서 발견된 31구의 시신은 대부분 손발이 묶여 있었기 때문에 자의로 죽음에 동의했다고 볼 수도 없었다.

참고로 양손이 묶여 있는 시신이 5구, 양손과 양다리가 묶여 있던 시신이 3구, 양다리만 묶여 있던 시신이 여러 구였다.

치안본부 감식반은 박순자가 죽은 뒤에 박순자의 두 아들(24세, 22세)이 차례로 이들을 살해하고 자신들은 목을 매어 자살했다고 보았다. 그들의 목을 맨 상처가 가장 깊었기 때문에 대들보에 목을 매었다고 보는 것이다.

오대양의 공장장 이강수는 이들의 시체를 천장으로 옮긴 뒤에 자신은 대들보에 목을 맨 것으로 추정했다. 물론 이강수도 31명의 사람들 중 상당한 숫자를 살해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오대양 사건은 미스터리다.

어쩌면 건국 이래 가장 큰 미스터리의 하나라고 볼 수도 있다.

31명의 추종자들이 사장, 또는 교주의 지시로 자살, 또는 자살에 동의했다는 것은 한국판 `인민사원` 사건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막대한 자금의 행방, 권력층과의 연계설이 나돌았고 두 아들이 박순자를 따라다니고 있었으나 충남도청에서 국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남편이 무관하다는 경찰의 발표를 국민들은 믿지 않았다.

채권자들의 빚 독촉과 경찰의 추적이 동기라고 볼 수도 있으나 석연치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오대양 사건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사건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