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유면은 가락국의 시조인 수로왕의 처남 허보옥(장유화상)이 허왕후를 따라 이 나라에 와서 불모산에 장유사를 창건하고 수행했던 곳이며 지금도 장유사와 장유화상 사리탑이 있으며 그 연유로 장유촌의 이름이 생기게 되었고, 능동마을은 가락국의 임금의 능이 있다하여 신라말기부터 향, 소 부곡이라는 특수마을의 하나로 제을미향이라 불렸으며, 광해군8년부터 효종7년까지(1616~1656년) 지금의 용산(진골) 소모진인 신문진이 설치되면서 국방의 요소가 되었다. 고종25년에는 장유면8개리(부곡,유하,내덕,무계,대청, 삼문, 신문, 관동)와 수남면 4개리(율하, 장유,응달, 수가)로 나뉘었다가 1914년 합병되면서 오늘날 장유면이 되었다.
무계리 지석묘
관동리 화산정사
연혁
고려시대 - 장유촌 + 유하촌
조선중기 - 김해부의 유등야면
순조 10년(1810년) - 유하면
고종 16년(1879년) - 유등야면
고종 22년(1885년) - 장유면
고종 25년(1888년) - 장유면 8개리 + 수남면 4개리로 분리
1914년 - 장유면 12개리 통합(장유면+수남면)
장유면의 특징
장유면 신시가지개발로 대규모 아파트 단지조성과 유통시설의 집중되어 있고 22천여명의 인구로 앞으로 급속도로 발전되고 있으며 2002년부터 율하지구 택지개발이 조성되므로 많은 인구유입으로 급속도로 성장이 가능한 도시로 발전됩니다.
잘 정비된 도로와 병원, 학교, 상가 등이 밀집되어 있을 뿐만아니라 곳곳에 산재된 근린, 어린이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도심속 녹지를 가까이 할 수 있으며 그리 높지 않은 용지봉 용두산 등 잘 다듬어진 산책로는 가벼운 운동에도 크게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장유대청계곡 및 신안계곡등 한여름을 시원하게 하는 유원지와 장유시립도서관 개관과 국제적인 물류단지인 김해관광대규모복합유통단지를 조성중에 있으며, 또한 면민 체력증진과 여가를 활용할 수 있는 장유실내체육관과 경마장공사가 진행중이여서 면민은 각종 문화체육혜택을 누릴수 있을 뿐만아니라 남해고속도로와 창원터널로 인하여 인근 주변도시와의 교통의 중심지가 될 전망입니다.
유하패총
지명유래
유하리(柳下里)
- 유등이 또는 유등야라 불리어 이것이 면의 명칭이 되기도 하였으며, 1914년 유하리에 상후포 하후포 하손과 무계리일부를 병합하였다.
유하(柳下)
버등이라 부르며, 유하리의 본마을임
하손(下遜)
유하의 동북쪽 산밑에 있는 마을인데 유하교를 사이에 두고 있다.
후포(後浦)
뒷개라고 부르며 상후포와 하후포로 나눈다. 유하리 산넘어 뒤쪽에 있으며, 내삼천가에 있다. 옛날에는 이 앞은 모두 갯벌이었다.
관동리(官洞里)
팔판산 아래 있으며, 옛날 적항역의 역관이 있었던 곳으로 관동이라 부르며 1914년 화촌리와 신문리 일부를 병합하였다. 명휘사와 화산재가 있다.
화촌(花村)
盤龍山의 남쪽에 있으며 뒷산을 火山이라하고 마을이름을 春花谷이라 불렀다.
죽림(竹林)
적항역이 있었던 마을로 驛마을로 불렀다가 대밭이 많아 죽림으로 고쳤다.
덕정(德亭)
오래전부터 저수지가 있어 덕동네라고 불렀다.(德은 둑이나 언덕을 칭한다)
신안(新安) : 옛날 그릇을 굽던 곳으로 사기점이라 하였다. 조선시대 순조때 신안으로 개칭되었다.
수가리(水佳里)
수가(水佳)
수가리의 본마을으로서 윗수가와 아랫수가로 나누어져 있다. 뒤에는 금병산이 응달리에서 시작되어 병풍처럼 둘러서 있고 앞에는 조만강이 흐르고 있다.
장전(長田)
탑동과 죽곡사이에 길다랗게 밭을 많은 마을이며, 앞들은 대우지, 물간, 성성개라고 부르고 있다. 1998년 부산광역시 강서구에서 장유면에 편입되어 현재는 김해 부산 공동 경마정 부지로 편입돠어 공사중에 있다.
내덕리(內德里)
- 옛날 용덕리(龍德里)였는데 철종(哲宗) 3년(1852년) 덕촌리(德村里)라 부르다가 1914년 유하리(柳下里)의 일부를 병합(倂合)하고 내덕리가 되었다. 조만강(潮滿江)으로 칠산서부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옛날부터 둑이 있었기 때문에 덕(德)마을이라고 하는 것이다.(德은 언덕이나 둑을 말한다) 1988년 9월 정천교(正川橋)에서 무계리까지 도로포장이 완공 되었고, 현재 서김해 I.C 연결도로 공사가 진행중이며, 2002년8월에 새로운 정천교가 개통될 예정이다.
내덕(內德)
안 용덕으로 용덕리의 안쪽에 있기 때문
외덕(外德)
바깥 용덕이며, 영조 35년(1759)외덕이 되었다.
용두산(114m)
옛날의 산성이며, 대가무성하여 일명 죽산이라고 불림.
부곡리(釜谷里)
부곡(釜谷)
가마실. 가매실이며, 동쪽으로 주석산, 동남쪽에 사리산있다.안 용덕으로 용덕리의 안쪽에 있기 때문
죽곡(竹谷)
대골이며, 부곡서쪽바깥 용덕이며, 영조 35년(1759)외덕이 되었다.
냉정(冷井)
장유 진례 주촌 2면의 경계가 되는 곳이며, 지금의 찬물嶝에 옛날부터 찬물샘이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무계리(茂溪里)
- 대청천(大淸川)과 핏내등 여러 개울이 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 1914년 광석암(廣石岩)을 합하여 무계리가 되었다. 신문리(新文里)와의 사이에 1937년 무계교(茂溪橋)를 김해시와의 사이에 1934년 정천교(正川橋)가 가설된 뒤 신문리에 있었던 신문장(新文場)도 이곳으로 옮겨지고, 1914년 장유면소(長有面所), 1919년 주재소(駐在所), 1922년 보통학교(普通學校), 1926년 우편소(郵便所), 1931년 금융조합(金融組合), 1933년 버스주차장(駐車場)등이 여기에 위치하게 됨으로서 김해시 서부의 중심지가 되었다.
무계리 지석묘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며 시내에 남아 있는 가장 완전한 남방식 지석묘이다.
삼문리(三文里)
- 中峰寺의 산문이 있었다고 사문리였으며, 三隱,三恩,斯文리의 別稱도 있었다. 1914년 능동과 월산동을 倂合하였으나. 현재 1995년 택지개발로 인하여 능동,월산마을은 옛모습을 찾아볼수 없다.
능동(陵洞)
중봉산아래에 있기 때문에 철종때 는 중리라고 불렸다.
신문리(新文里)
- 신문진이 있었기 때문에 신문리였으며, 신문장도 이곳에 있었다. 신문진이 熊川縣으로 이설되어 간 뒤에 신문으로 改稱된 듯하다. 1914년 봉림리 용산리 및 삼문리가 각마을을 倂合하여 신문리가 되었다.
대청리(大淸里)
불무산·용지봉·추월산아래에 있어 여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맑기 때문에 대청천·대청리라고 한다. 1914년 계동과 상점을 병합하였다. 장유사로 올라가는 계곡과 장유폭포가 유명하다.
율하리(栗下里)
율하(栗下)
밤내재 밑에 있는 마을로 율리라고 하였다.
구관동(舊寬洞)
순조초까지도 관동이라 불렸다. 땅티라고도 하며, 서남쪽은 윗골 암쪽은 배나무골이다.
장유리(長有里)
장유(長有)
본장유이며, 지금 台亭山이 長遊山이므로 장유화상이 처음 이곳을 찾아 절을 세웠다고 한다.
모산(牟山)
장유의 북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독뫼의 모양이 소가우는 形局이므로 소울 모(牟)자를 붙였으며, 이소는 율하리 구시골을 보고 울고 있는 것이다.
응달리(應達里)
응달(應達)
본부락인데, 마을을 위응달과 아랫응달로 나누어지고 있다.
태정(台亭)
가락시대에 왈의 胎를 묻었다는 태봉이 있기 때문에 胎葬里라고 하다가 이것이 台長里,台亭里로 고쳐진 것이다.
용곡(용谷)
태정산의 세 골짜기 물이 흘러내리는 곳이므로 수남면 삼곡면라고 하다가, 옛날부터 물레방아가 있었기 때문에 建陽2년(1897) 용溪里로 고치고 한때 龍溪里라고도 하였으나, 1960년 용谷으로 改稱되었다.
장유사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