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태봉/ 본지 편집국장>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왕통을 계승한 조선 왕조의 저력은 분수를 아는 선비정신과 청렴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는 학자들의 분석이 있다.
조선조 중종 때 안단대(安垣大)라는 몹시 가난한 선비도 이 유형에 들어간다고 한다. 현재 안단대의 묘소는 경기도 안산시 성곡동에 모셔져 있는데 이 안공의 행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에게는 매우 예쁘고 총명한 딸이 있어서 궁녀로 간택 받아 대궐에 들어가 중종의 후궁이 되었다. 현재 같으면 안공은 딸 때문에 일약 출세의 가도를 달리게 되는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너무나도 귀하신 몸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더 조신하고 외출을 삼가하는 등 매사에 신중했다. 이웃 아이들이 떠들고 시끄럽게 해도 아무런 꾸중이나 벌도 가하지 않고 조용히 타일러 보냈다. 남에게 위세를 부리거나 화내는 일도 없이 그저 묵묵히 자신의 일만 살폈다.
그러던 중 딸이 왕자를 잉태하고 난 다음부터는 더욱더 몸조심을 하고 반찬 수를 다섯 가지에서 세 가지를 줄이고 일체의 문밖 출입을 삼가했다. 왕자의 외가집이라는 말이 듣기 거북했기에 손수 행동으로 이를 실천했다.
그러다가 그 딸의 둘째 아들이 선조대왕의 생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으로서 선조가 왕위에 오르게 되자 안공의 지체는 존귀해져만 갔으나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생활했으며 결코 화려한 옷을 걸치지 않았다.
다만 노안(老眼)이 되어 보이지 않은 것만 빼고는 정말로 생활은 군더기 하나 없었다. 한날 선조대왕은 외증조부인 안공을 위해 무엇인가 해 드리고 싶어도 한사코 사양하기에 선조도 어쩔 수 없었다.
외증조부의 성품을 간파한 선조는 신하를 시켜 담비로 된 외투를 외할아버지에게 드리려고 의중을 떠보았으나 안공은 ‘나는 본래 천한 사람으로 담비 옷을 입는다는 것 자체가 죽을죄를 짓는 것과 다름이 없고 또 상(上/임금)의 명령을 거역해도 죽을죄를 짓는 것인데 이왕 죽을죄를 짓는 바에야 분수나 지키고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며 이를 단호히 물리쳤다.
도의적 기반 속에서 올곧은 선비정신 하나로 자신을 지켰던 안공은 분수를 알았고 청렴을 실천하였기에 조선 왕조가 500년 동안 계승할 수 있었다고 본다.
일찍이 증자(曾子)는 ‘군자는 생각하는 것이 자기의 분수를 넘지 말아야 한다’고 설파했다. 우리 속담에 ‘사주에 없는 관을 쓰면 이마가 벗어진다’고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