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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그립다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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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그립다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
  • 안태봉
  • 승인 2013.01.23 14: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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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눈 오는 날 의령 상가를 지날 즈음 오른쪽 기슭에 남명선생의 탄생지 정화작업을 하는 것을 보았다. 순백으로 덮인 조공의 생가를 조용히 관조하자 옛 선비의 올곧은 지성과 인품이 내 몸에 엄습하고 있었다.

조식은 조선시대 연산군 7년(1501년)에 탄생하여 선조 5년(1572년)에 서거하신 대학자였다.
자는 건중(健仲), 호는 남명(南冥), 시호는 문정(文貞)이라 불렀다.

본관은 창녕으로 정랑(正郞)이란 벼슬을 지낸 조언형의 아들이었다. 조공은 어려서부터 성리학(性理學)을 공부하여 통달하였을 뿐 아니라 인품이 뛰어나 많은 사람이 스승으로 모셨다.

중종 때 이언적이 조공의 뛰어난 문장과 인격을 흠모한 나머지 그를 천거해서 헌릉참봉에 임명케 했으나 불응했다. 명종 때 단성현감에 피명 되었으나 역시 사퇴했다.

이듬해 퇴계 선생이 서신으로 권하여 벼슬에 나오라 하였으나 듣지 않다가 상서원 판관이란 직책을 제수받아 명종대왕을 사정전(思政殿)에서 뵙고, 치란(治亂)의 도리와 학문의 방법을 표(表)로 올리고 다시 산으로 들어갔다.

이후에도 계속하여 부름을 받았으나 끝내 나가지 않고 두류산 덕소동에 칩거하며 지냈는데 당호를 산천재(山川齋)라 짓고 항시 사색하고 성리학 연구에 몰입했다. 당시 조공의 학행은 조선 선비들에게 사표(師表)가 되었으며 퇴계 선생과 더불어 명망 높은 대학자로 군림하신 어른이다.

서거하자 선조대왕은 대사간(大司諫)으로 추증했고, 광해군은 영의정과 함께 시호를 내렸으며, 남명서원에 모셨다. 작품은 남명가, 왕릉가, 권선지로가 등이 전하고 있다고 한다.

조공의 독특한 학문은 지금도 성리학을 연구하는데 참고서가 되고 있다 하니 그 깊이가 얼마인가 감내하기 어렵다.

이 조식의 우음(偶吟:우연히 읊다)이란 시가 있기에 여기 소개한다.

인지애정사(人之愛正士)
호호피상사(好虎皮相似)
생전욕살지(生前欲殺之)
사후방칭미(死後方稱美)

누구나 옳은 사람 사랑하기를
호피를 좋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생전에는 미워서 죽이려 하나
사후에는 입을 모아 칭찬하는구나.

시에서 남명선생은 사람이 살아서는 죽일 놈으로 미워하다가도 죽으면 입을 모아 칭찬하는 세태를 풍자하고 있는 것이어서 조공의 뜻을 오늘에 기려본다.

평생을 산천재에서 지내면서 후진들을 제도하셨던 것으로 유명하며 얼마 전 조공의 탄생 512주년 기념식을 가지는 등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행사를 가졌다.

그립다. 남명선생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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