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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날 행사 전국동시 반환운동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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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날 행사 전국동시 반환운동 하자
  • 특별 취재팀
  • 승인 2013.08.14 14: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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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광복절 기념 특집

시민단체 "역사적·지리적·문헌상 대마도는 동래부 부속도서"
대마도 찾기 본부 "대마도 반환, 국민 모두 목소리 높여야"
경남 창원시 의회 2005년 3월 15일 대마도의 날 조례재정


1950년 한국전쟁으로 중단된 대마도 반환요구는 아직도 유효하며 포츠담선언에 의하여 일본은 불법적으로 편입한 대마도를 반환하여야 한다.-대통령 이승만-

   
 
  ▲ 창원시의회가 대마도의 날 재정 제8주년 기념식을 가지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8월 18일‘우리는 일본에 대마도를 한국에 반환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

대마도는 상도와 하도의 두 섬으로 되어 한일 양국의 중간에 위치한 우리 영토인데 350년전 일본이 탈취한 것이다.’ 라고 주장하며 대마도 반환운동의지를 밝히기도

이승만 대통령은 다음해인 1949년 1월 8일 ‘대일(對日)배상 문제는 임진왜란부터 계산하여 시작하여야한다. 대마도는 별개로 하여 취급되어야 할 것이다. 1870년대에 대마도를 불법적으로 삼킨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으로 소유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돌려주어야한다.’ 며 강력하게 반환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같은 해인 12월 31일 ‘대마도는 우리의 실지를 회복하는 것이다. 대마도 문제는 일본인이 아무리 주장해도 역사는 어쩔 수 없다.’는 발표를 하기도 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대한민국 건국 후 가진 첫 연두 기자회견(1949년 1월 7일)에서 “대일(對日) 배상 청구는 임진왜란 때부터 기산해야 한다”고 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대마도(對馬島)는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에 조공을 바친 우리 땅이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이 그 땅을 무력 강점했지만,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으로 소유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돌려줘야 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350년 전 일본인들이 그 섬에 침입해 왔고, 도민들은 민병을 일으켜 일본인과 싸웠다”며 “그 역사적 증거는 도민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마도 여러 곳에 건립했던 비석을 일본인들이 뽑아다가 도쿄박물관에 갖다 둔 것으로도 넉넉히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대마도는 한국 땅’임을 천명할 근거는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수두룩하다. 대마도는 부산에서 최단거리가 49.5㎞로 일본의 후쿠오카(134㎞)보다 훨씬 가깝다. 1822년 편찬된 ‘경상도읍지’를 비롯해 ‘삼국접양지도’, ‘조선팔도지도 원본’ 등은 대마도가 부산 동래부의 부속도서로서 지리적·역사적·문헌상으로 우리 땅임을 분명히 했다.

대마도의 초대 도주로 추앙받는 소 시게히사(宗重尙)와 관련, “원래 우리나라 송씨로, 대마도에 들어가서 성을 종(宗)씨로 바꾸고 대대로 도주가 됐다”는 기록(1740년 간행된 동래부지)이다. 대마도의 일본명인 ‘쓰시마’의 유래와 맞물려 깊이 살필 만한 증언이다.

모든 고유명사에는 나름의 연원이 있다. 일본의 경우도 ‘동쪽의 서울’이란 뜻을 가진 도쿄(東京), 고대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유민들이 ‘새로운 국가’를 세운다는 결의를 담아 이름 지은 ‘나라(奈良)’ 등 지명(地名)의 유래와 의미가 각양각색이다. 그런데 유독 ‘쓰시마’에 대해서는 딱 부러진 유래를 찾지 못해왔다.

‘쓰시마’가 왜 그렇게 불리게 됐는지, 일본 학자들도 답을 찾지 못하던 수수께끼를 풀어낸 사람은 고 양주동 동국대 교수였다.

양 교수는 “쓰시마의 뜻풀이는 복잡할 게 없다. 한국어의 ‘두 섬’을 일본식 발음으로 표현한 것뿐, 대마(對馬)라는 한자는 아무 뜻도 담기지 않은 단순한 차음”이라고 딱 부러지는 설명을 내놨다. 이 해석은 이승만 대통령이 연두회견에서 “대마도는 上島及下島(상도와 하도)의 二島(두 섬)로 되어…”라고 언급한 것과도 맥이 닿아 있다. 유서 깊은 일본 도시 ‘나라’와 마찬가지로 ‘쓰시마’도 한국어에서 유래됐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다.

한국의 옛 조상들은 지명을 외형적 특성을 살려 지은 경우가 많았다. 부산 앞바다에 있는 일련의 섬들을 ‘어떤 때는 다섯개로, 때로는 여섯개로 보인다’고 해서 ‘오륙도’로 이름붙인 식이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섬을 같은 방식으로 ‘두 섬’으로 부른 게 ‘쓰시마’로 둔갑했다는 게 양 교수의 설명이다.

▲경기도 의정부시의회가 대마도 영유권을 주장하며 중앙 정부와 국회에 대책을 촉구했으며 일본 정부에는 즉각 반환을 요구했다.

의정부 의회는 2013년 7월 22일 임시회를 열어 이 같은 내용의 '대마도 실질 회복을 위한 정부 차원의 대응 촉구결의문'을 채택했다.

시의회는 결의문을 통해 "대마도는 지리적 위치와 역사적 사실, 과학적 근거로 볼 때 우리 영토가 분명하다"며 "정부는 이를 정식으로 거론해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에 각인시키고 영유권 확보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의회는 일본 정부에도 독도 영유권 주장을 철회하고 대마도를 즉각 반환하라고 요구하며 결의문을 대통령, 국회의장, 외교통상부장관, 주한일본대사관 등에 전달하기로 했다.

▲ 충북 괴산군 시민단체가 일본이 강제 점령한 대마도(쓰시마)를 돌려받기 위해 지난해 10월출범한 '일본이 강제 점령한 우리 땅 대마도 반환운동본부'가 최근 명칭을 바꾸고 전국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기로 했다.

지난 5월 괴산군에 단체등록을 마친 이 단체는 대마도 반환 활동을 위한 자료 수집과 함께 전문가를 초청해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주권의식 교육을 강화하기로 했다.

본부는 지난해 11월 30일 중원대에서 학술 세미나를 열어 대마도 반환 운동 방안을 논의했고 “독도 영유권만을 놓고 일본과 대립할 게 아니라 모든 국민이 대마도 반환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본부는 이에 앞서 지난해 10월 10일 발대식에서 “일본이 1945년 7월 독일에서 열린 포츠담선언에서 대마도가 대한민국 영토임을 인정했지만 지금까지 반환하지 않고 오히려 독도가 자신의 영토라는 허위 주장을 하고 있다”고 성토한 바 있다.

현재 대마도에는 구한말 항일 의병장으로 대마도에 끌려와 순국한 면암 최익현 선생의 장례식을 치렀던 슈젠지(修善寺), 대마도 번주의 양자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결혼한 고종 황제의 딸 덕혜옹주 결혼 봉축비가 세워져 있다.

조선통신사 비를 비롯해 1803년(조선 숙종 29) 조선 역관사 108명이 풍랑으로 배가 침몰해 목숨을 잃은 조선역관사 순국비와 한국전망대 등도 있다.

▲대마도 초대 도주로 추앙받는 사람이 원래 우리나라 사람이고, 대마도가 우리땅이라는 중요한 자료가 발견됐다.

시민단체들은 8.15광복절께 각 대학 총학생회, 부산 경남 등 남해안 지역 청년회의소(JC)와 연대해 대마도에 상륙해 태극기를 게양하고 '대마도=한국 땅'을 내외에 선포할 계획이라고 했다.

이 밖에도 태극기 휘날리기운동, 지구촌 네티즌들을 대상으로 한 국제 홍보와 더불어 “대마도의 날 제정 동참과 일본정부를 대상으로 대마도 반환을 당당히 요구하라”는 국회 청원을 낼 방침이다.

또한 박근혜 대통령을 향해 "대한민국을 건국한 초대 이승만 대통령도 1948년 8월 18일에 대마도 반환을 요구한 후 이듬해 1월 7일에도 재차 반환요구를 천명했다" 며 "잃어버린 대마도 실제 회복에 나서야만 주권국가로서 민족자존을 회복할 수 있다"고 요청했다.

▲대마도는 구한말 시대 일본이 일방적으로 편입했다.

1859년 3월 31일 미일화친조약(美日和親條約)으로 개항한 일본은, 미국과 영국의 유도에 의해 국내 정세가 크게 변했다. 이에 따라 조선과 대마도의 관계도 일변하였다.

도쿠가와 막부는 대마도가 대행하고 있던 조선과의 외교와 무역을 직접 관장하려 했다. 1868년 1월 3일 도쿠가와 막부의 조번체제(朝藩體制)가 붕괴하고 왕정복고·왕위 친정체제를 구축하려는 정변이 일어났다.

이로써 웅번(雄藩)들은 판권봉환(版權奉還·왕정으로 복귀함에 따라 각번의 영주들의 영역권을 천황에게 바치는 것)에 들어가, 도쿠가와 막부의 제15대 장군인 도쿠가와 시게노부(德川慶喜, 1837∼1913년)도 정권을 개혁 조정에 반환하게 되었다.

1871년 8월 29일에는 폐번치현(廢藩置縣·막부 시절의 번을 없애고 근대적 지방 행정기관인 현을 두는 것)을 실시했다. 이로 인해 외번부용(外藩附庸)의 대마도주 종의달(宗義達, 1847~1902)도 대마도를 판적봉환하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종의달은 조신(朝臣)과 근위소장(近衛小將)이라 칭하고 이스하라(嚴原) 번지사 (藩知事)가 되었다. 그러나 1877년 대마도는 나가사키현에 편입되면서, 현에 속한 지방 행정지로 격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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