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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식의 허튼소리- 푸짐했던 이병철 회장님 조상묘사 떡 봉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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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식의 허튼소리- 푸짐했던 이병철 회장님 조상묘사 떡 봉지
  • 경상도 촌놈 조유식
  • 승인 2013.09.24 17: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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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학력 '무학'으로 기자가 되기까지

1950년대는 대부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끼니 걱정을 하던 때라 필자의 또래와 형 누나들도 산과 들에서 먹을 것을 찾아 배고픔을 이겨 내기도 했다. 동냥생활 중에 가장 힘든 시기는 추운 겨울과 비 오는 날이었다.

추운 날은 모두가 방안으로 들어가 밥을 먹기 때문에 대문 밖까지 나와서 동냥 꾼들을 반기는 친절한 집은 별로 없었고 비가 오는 날은 더욱 눈치가 보여 동냥을 포기하고 굶기도 했다.

동냥을 하다 보면 밥 한 숟가락보다 된장이나 누룽지를 퍼주는 아주머니들도 더러 있었다. 고맙고 감사하지만 동냥 꾼들에게는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왜냐하면 보통 아침에 동냥하여 점심과 저녁까지 해결하는데 된장이나 누룽지가 들어가면 보관이 곤란하여 한 끼에 다 먹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동냥 꾼들에게도 기다려지는 큰 희망이 하나 있었다.

가난한 집 아이들에게 큰 희망이란 설 추석 명절도 아닌 바로 이 고장 출신 삼성그룹 창업자인 이병철 회장님의 조상 선산에서 올리는 묘사이다.

성묘 철이 되면 이산 저산을 쳐다보고 흰 한복 차림의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는 곳으로 달려가 묘사 떡 한목아치(한사람 몫)를 받아 와 두고두고 맛있게 먹는다. 시골에다 별다른 간식이 없는 아이들에게 여러 종류의 묘사 떡은 별미 그 자체가 아닐 수 없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가장 인기 있는 묘사는 단연 이병철 가의 조상묘사로 이때는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마을 사람 다수가 이병철 회장님의 선산으로 몰려갔다. 이병철 회장님의 조상묘사에 동원된 재물들은 어지간한 부잣집 잔치상 그 이상이었다. 때문에 이웃마을 아이들까지 묘사를 기다렸다 달려오곤 했는데 찾아온 모든 사람들에게(아이 포함) 골고루 한목아치를 나누어 주었다.

이때 아이를 업고 오면 두 몫을 주었기에 묘사철만 되면 형제끼리 어린 동생을 서로 보겠다고 난리가 난다.

이병철 회장님의 조상묘사 떡 봉지에는 돼지 수육을 비롯해 문어 등 생선 과일 과자 등 한마디로 한 보따리다.

나이가 들고 난 후 느낀 의문점은 묘사 떡 보따리 말고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 마을에 대해 왜 그토록 인색했는가 하는 것이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그 골목 돌담장은 그대로 있으며 자신의 생가와 그 주변만 잘 정비가 되어 있을 뿐이다.

성묘 철이 끝나가는 겨울 어느 날, 동네에 하나뿐인 방앗간으로 아이들이 몰려가는 것을 보고 필자도 따라갔다. 방앗간에 도착해 보니 동내 형들과 누나들이 먼저와 바가지를 들고 줄을 서 있었다.

형들에 따르며 한 달에 한 번 돌아가는 방앗간에서 보리를 찧고 나오는 딩기(겨)를 받아가 수제비도 해먹고 쑥 죽도 끓여 먹는다는 것이다. 처음으로 방앗간을 찾아온 필자를 본 그 형들이 필자를 보고 네가 제일 어리니 우리가 양보한다며 필자를 제일 앞줄에 세워 주었다. 너무나 기쁘고 형들이 고마웠다.

방앗간 기계가 돌아가면서 보리에서 깎여 내리는 조금 까칠한 보리의 속 겨를 반 바가지 정도 받아 집으로 돌아오면서 형들에게 고맙다고 수십 번도 더 인사를 했던 것으로 생각난다. 하지만 필자가 방앗간을 자주 들락거리면서 그때 그 형들이 필자를 고의적으로 골려 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방앗간에서 찧는 보리나 쌀은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것이 보리와 쌀의 눈이 가장 많이 붙어있고 밀가루처럼 부드러웠던 것이다. 따라서 밀가루와 비슷한 최상의 딩기를 얻기 위해서는 제일 끝줄에 서 있어야 하는 것이고 끝줄에 서 있는 형들이 그 밀가루 같은 최고급 딩기의 주인이 되는 셈이다. 결국 필자는 제일 앞줄에 서서 제일 나쁜 거친 딩기만 받아가면서 기뻐했던 것이다.

어찌 되었던 그때부터 동네 형들이랑 6.25 당시 사격장으로 보이는 남산의 황토 속에 박혀 있는 총알 탄피를 파내어 엿장수에게 갖다 주고 엿하고 바꿔먹기도 했으며 정월 대보름날에는 마을주민들이 마을 입구에 있는 엄청나게 큰 당산나무에 당산제를 지내고 두고 간 음식들로 배를 채우기도 했다.

(다음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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